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목사] “희망을 품고 가는 길” – 2025년 1월 19일 주일예배

에스겔서 47장 8-12절, 로마서 8장 18-25절

오늘은 주현절 둘째주일이자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은 여신도회를 주일을 지정하고 전국의 교회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같은 예배문을 가지고 공동의 예배를 드립니다. 여성을 제자로 부르셨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고, 다시금 이 땅에 그 가르침을 전하고 생명 평화 정의를 이 땅에 일구는 일꾼이 되고자 다짐하는 주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함께 한 여성들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하고, 함께 살고, 일할 것을 새기는 날이기도 합니다.

[복합위기의 시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합위기의 시대입니다. 현재 한국 정치 및 경제의 불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돌파하며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이로 인해 복지 불안과 제도 개선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기후 재앙을 막는 마지노선’이라 불리는 1.5도선이 지난해 처음으로 뚫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연합 기후변화 감시 기구인 코페르니쿠스 기부변화연구소는 작년 1~11월까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62도 높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기후 붕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이상현상이 발생하고, ‘이례적인’, ‘역사상 가장’ 등 날로 갱신하는 기후 위기의 징후들은 많은 생명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AI)으로 인한 산업전환은 누군가는 혜택을 보고, 누군가는 위험을 부담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거기에 각 개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불안의 요소들은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단은 올해 주제를 “교회여, 다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자!”로 정했습니다. 생명사랑교회 올해 표어이기도 합니다. 언제 갑자기 파국적인 종말이 닥치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여전히 생명 살림이고, 평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고, 익숙한 것과 전혀 다른 생명의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하나님의 사랑,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살리는 일에 자신을 내던진 모습, 많은 이들을 회심하게 하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증언하게 만든 부활을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파국적인 종말이 아니라 희망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가 아닙니다. 절망의 순간마다 신앙의 선배들은 구원의 희망을 품고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열 명의 의인만 있어도 구원해주리라(창 18:32)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걸어 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한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결국 무너졌지만 우리가 주목해 봐야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딜을 했고, 예레미야는 그 한사람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임박한 종말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의인 한 명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반대로 의인 한 사람 덕분에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갔음을 보여준 책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의 탄식]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로마서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상황에서 피조물까지 신음하는 고통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18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미래의 열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달라졌다는 것은 이 현실이 구원의 낙원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절망 속에 미래를 향한 출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와 ‘장차’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은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바울은 소망의 빛으로 현재의 고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관점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 전체로 확대됩니다. 기후위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요즘, 우리의 미래적 소망이 피조세계와 연결되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환경을 파괴해서라도 나만 잘 살자는 식의 욕망을 넘어, 우리가 속한 모든 생명체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피조물의 회복이 인류 구원의 완성에 달려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단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기다린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즉,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피조물은 그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타남을 기다린 다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 중 주목해야하는 것은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개발과 자연착취를 서슴치 않았고, 동물을 학대해 왔으며,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이제 피조물은 인간의 탐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은 이 죽음과 착취의 사슬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외침이며 몸부림입니다. 그들을 살려낼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는 탄식입니다. 우리는 이 피조물들의 희망이 되어야합니다.

인류가 인간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동안, 그것이 발전과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줄 것, 그것이 인간의 편리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외침 가운데, 피조물은 성장과 번영의 채찍 앞에 짓눌리고 죽어갔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품기]

다음으로 ‘기다림’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간절히 기다리다’로 번역된 ‘ἀποκαραδοκία(아포카라도키아)’는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처럼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희망이 구원을 얻게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그래서 아직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희망에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분노와 용기입니다. 분노는 정당한 분노, 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용기는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하는 힘입니다. 희망은 거룩한 분노와 행동하는 용기가 결합할 때 힘을 얻습니다. 생명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목격하고, 그 현실에 분노하며, 그 분노가 우리를 생명 살림이라는 길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두 개의 동사 ‘희망하다(바라다)’와 ‘기다리다’를 같이 놓음으로 희망하는 자세의 미묘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능동형과 수동형을 함께 사용합니다. 성서적 맥락에서 희망한다는 것은 가만히 서서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투장 가운데 탄식하고 울부짖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해산하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의 시기를 겪지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그 희망인 구원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기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겸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태적 회심을 향해]

박노해 시인의 <다시>라는 시가 있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우리가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절망과 불안한 현실 가운데 살더라도 늘 그 틈을 뚫고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보았다면 그 희망을 놓지 말고 품고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생태적 회심입니다. 생태적 회심이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본문은 하나님의 생명 살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을 주제로 하는 47장 1~12절의 본문에서 ‘물’이라는 단어가 12번, ‘강’이 6번, ‘바다’가 2번씩 언급이 될 정도로 물이 중심 단어입니다. 그 물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온다는 것, 물이 생명 살림과 치유의 원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풀이 돋아나고 약초가 자랍니다. 그 약초가 아픈 이들을 치유합니다. 인간은 주도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연 안에 속한 부분적 존재로 자연에 의존하는 생명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물은 처음에는 잔잔히 흐르던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점점 불어나 발목, 무릎,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불어나더니 나중에는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의 강이 되고 바깥으로 나가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생명의 충만함을 채워줍니다. 우리의 희망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에 완고하기 때문에 생태적 회심이 느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행동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한 개인의 생활 바꿈이 거대한 기후 위기를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 한 명 바뀌어도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 역시 그 개인의 욕망이 모여 이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다시 그 개인을 모아야할 때입니다. 정치인, 기업인들에게 온실가스감축에 노력할 것을 요구해야 하고, 생명 살림의 가치에 투자해야 합니다. 나의 불편 또한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시작은 두려워하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그 작은 손길이 모여 많은 빛을 이룬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 생명 살림을 위한 작은 노력은 솟구치는 샘물이 되고, 그 물들은 모여서 강을 이루고, 그 물은 흐르는 곳마다 그 주변에 생명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품는 사람들입니다. 거대함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해서 긴박하면서 동시에 느린 변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방법을 찾고, 영감을 얻습니다. 물론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 흐름 가운데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내와 기다림에 지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기다림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섭니다. 희망을 품고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 땅에 보내주심을 기억합니다.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다양성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를 통해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보금자리를 얻었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 이 지구와 깊이 연결되어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 방임과 학대가 기후 위기와 피조물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