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목사] 경청(Listening) – 2025년 1월 12일
이사야 40:3-8; 누가복음 3:4-11
2025년 새해의 아침이 밝은 지 벌써 두 주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육성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옆 사람과 인사 나누기를 하는 모습들이 너무 정겨워서 저도 오늘 설교를 다소 뒤늦은 감은 있지만, 새해 인사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올해가 푸른 뱀의 해이고, 뱀은 지혜의 상징이니 옆 사람과 다정하게, “성령의 지혜로 한 해 복 많이 지으시기를 바랍니다”고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방금 전 봉독한 두 본문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두 개는 본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실까요?
두 본문이 지니는 공통점을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해보자면, 첫째, 어둠의 시대에서 빛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지방 본문입니다. 둘째, 두 본문에는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셋째, 지각 변동 속에서 “무엇을 할까요?” 질문하는 자가 있습니다. 넷째, 그 대답은 엉뚱한 듯 보이지만 본질로 돌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네 가지 닮은 점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하늘의 뜻을 새기고자 합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오늘의 두 본문은 기류를 달리하는 두 개의 시간 혹은 공간 사이에 위치한 본문입니다. 시간을 더 강조한다면 이행기(transitional) 본문이라고 불러도 좋고, 저는 공간의 차이를 강조해서 문지방 본문이라고 불러보았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분들은 이사야서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39장은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심판과 멸망의 예언이, 40장 이후로는 기원전 5-6세기의 바벨론 제국시대 포로민과 페르시아 제국시대 귀환민들을 향한 위로와 구원의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한 권으로 된 예언서지만 그 안에 300-400년이라는 커다란 시대적 간극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40장은 그 큰 기류의 전환이 일어나는 출발에 서 있는 본문입니다. 이 구성은 구약과 신약의 전체 성경 구성과도 닮은 꼴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39권과 신약의 27권이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서 장차 올 메시야를 예언하고, 메시야 예수의 탄생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본문인 누가복음 3장도 기류의 전환점에 선 본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이사야의 구원 예언만 믿고 안일한 종교 생활을 한다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회개(돌이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멸망에서 구원으로, 좌절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이사야가 외쳤다면, 구원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실천을 통해서 올 것이라는 또 다른 전환을 세례요한은 외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두 본문을 문지방 본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억압과 어둠의 시간이 희망과 빛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공간으로 적절한 이미지로 문지방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문지방은 함부로 밟아서는 안되는 어떤 공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문지방과 관련된 터부가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걸 보면, 고대인들 사이에는 문지방이 ‘신령이 깃들어있는 장소’라는 보편적 믿음이 공유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의 문지방 터부를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그 집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
문지방에 밥사발을 올려놓고 먹으면 귀머거리가 된다.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
문지방을 베고 자면 입이 삐뚤어진다.
히브리어로 문지방은 미프탄(מִפְתָּן)과 싸프(סַף)인데 이 두 낱말은 구약성서에서 각각 8번, 25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문지방은 우상의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 나부러져 있는 장소이고(삼상 5:4-5; 스바냐 1:9), 아스돗 사람들은 다곤 신전에 들어갈 때에 문지방 위를 밟지 않고 넘어서 들어갑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문지방을 신령이 깃든 장소로 여긴 듯하지만, 그들은 이를 반전시켜, 성전의 문지방을 야웨 하나님의 현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장 4절은 야웨의 현현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한다고 묘사합니다. 에스겔 10장 4절은 야웨의 영광이 성전의 문지방에 가득했다고 묘사합니다.
문지방의 존재 자체가 신성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류가 다른 두 곳을 연결하는 공간의 상징으로서 문지방은 기류의 차이 때문에 균열이 발생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레 두 번째 공통점, 지각 변동으로 넘어갑니다.
두 본문은 공통되게 높은 곳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높아져 평평한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는 지각 변동을 언급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러한 지각 변동에 견줄만한 변화의 상황에 해당되는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로는 탄핵정국이, 생태적으로는 기후붕괴가, 생명사랑교회로서는 1대 담임목사님이 닦아놓은 기초 위에 2대 담임목사님과 함께 그 터를 다지고 확장 시킬 전환의 기점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인 문지방의 터부와 달리, 성서에는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에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들”(렘 35:4; 52:24; 왕하 12:9; 22:4; 23:4; 25:18)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음을 소개합니다. 문지방에는 문이 있기 마련인데 그 문은 무언가의 끝을 닫아주거나, 다른 무언가의 시작을 열어주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문지방에 서있는 아니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특별히 이번 기장 총회 주제 본문이기도 한 에스겔 47장의 8-12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언급하는데, 1절은 그 물이 성전 문지방에서 발원한다고 소개합니다. 성전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을 살리고, 심지어 생물의 생존이 불가능한죽음의 바다(사해)조차도 온갖 생물들도 가득하게 만드는 놀라운 치유력을 지닙니다. 그 까닭은 그 물이 야웨 현현의 장소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공간일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빛과 희망으로 도약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지각 변동이나 지각 변동에 견줄만한 삶의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지요? 뜻하지 않은 재난을 맞닥뜨릴 때 우리의 반즉각적인 반응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생존 본능에 따른 방어기제의 발동입니다. 반면에 지각 변동 때문에 생기는 외부의 굉음과 혼란 속에서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께 묻는 반응도 있습니다. 오늘 두 본문에서의 세 번째 공통점이기도 한 데, 혼란의 시기에 예언자는 “무엇을” 할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지각변동의 삶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신속하게 결정하는 지, 아니면 굉음에 묻힌 신성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나의 두려움과 공포 너머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지에 따라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갈리게 됩니다.
위기 속에서 “무엇을 할까?” 묻는 대표적인 방식이 기도입니다. 흔히 기도를 우리의 탄식과 소원을 열거하는 말하는 시간으로 여기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그 신성한 목소리를 듣는 대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 “무엇을 할까?”라고 질문하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셀프 답변과 행동을 하는 성격 급한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할까요?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네, 맞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잘” 들어야 합니다. 지각변동의 위기 속에서는 외부적인 소음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다욱 “잘” 들어야 합니다. 단순한 청취를 넘어 잘 듣는 행위를 ‘경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진정한 경청을 위해서 새겨야 할 세 가지 경청의 단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나의 듣는 습관을 들여다보는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들을 때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무엇을 들을지 정하고 듣는 습관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삶의 덕목에 초점을 두고 사는 가와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서서, 무엇을 초점에 두고 듣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내가 어디에 서서 어디 무엇을 외쳐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보이게 됩니다.
국제 분쟁을 조정하고 갈등 전환을 통한 화해를 이끌어내는 평화운동가 존 폴 레더락은 <화해>란 책에서 일상의 균열을 깨는 갈등에 접근하는 네 개의 덕목- 진실, 자비, 정의, 평화-을 시편 85편을 기초로 설명합니다.
시 85편 7-13절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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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8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성도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9 참으로 주님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니, 주님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 것입니다. 10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11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12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13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지각 변동과 같은 대혼란과 위기 속에 여러분이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은 레더락이 말한 네 가지 덕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최근 발생한 항공기 참사를 예를 들면, 참사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떠한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듣는지를 살펴보면 여러분의 경청 습관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고의 원인에 귀 기울이신 분들은 진실이 중요합니다, 항공사 측이나 정부의 대응의 옳고 그름에 화가 나는 분들은 정의가 중요합니다. 유가족의 아픔에 현장으로 달려간 분들은 자비가 중요합니다. 사건에 깊이 관여하기보다 조용히 침묵하며 함께하는 분들은 소극적 의미로 평화가 중요한 분들입니다. 하나의 덕목이 다른 덕목보다 더 필요하고 우세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경청에 가장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경청 습관을 아는 것은 자신의 습관을 넘어 하나님의 소리와 나의 내면의 소리가 같은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다시 항공참사를 예를 들자면 우리의 경청 습관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참사를 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즉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경청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사 속의 숫자로 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일본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동일본대지진 후에, 그 죽음의 무게를 이렇게 말합니다.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번 일어난 것이다.” 이번 항공참사는 179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아니라 귀중한 생명의 죽음이 179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항공 참사에서 가장 약자인 희생자와 그 유가족의 자리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희생자분들을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추모하며 유가족분들에게 위로와 애도를 표합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경청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듣거나 왜곡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귀 기울이고 그 말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두 본문의 네 번째 공통점이기도 한데, 하나님께서 답변으로 주시는 “무엇”은 외치는 자의 질문과 어쩌면 내용이 다른 다소 쌩뚱맞은 답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외칠까? 묻는 이사야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다”였습니다. “무엇을 할까?” 묻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였습니다. 두 답변의 요지는 “본질로 돌아가라, 본질에 충실하라”입니다. 아마도 포로지 예언자와 서기관들은 그 외침을 잘 들었는지, 귀환할 때 서기관 에스라는 토라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은 선교 여행에서 보따리를 만들지 않고 다니며 배고픈 자, 헐벗은 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끝으로 경청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청한 내용을 삶으로 살아내는 적극적 행위입니다. 경청은 소극적 듣는 행위가 아니라 듣는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존을 위해서, 공포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기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해방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외쳐야할 지 경청했다면, 그것이 설혹 나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일지라도 담대하게 행하고 무소의 뿔처럼 꿋꿋하게 전진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 생각과 내 기대와 다른 응답이라도 실천하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삶에 일상의 균열을 일으키는 크고 작은 지각 변동을 경험할 때, 외부의 소란과 굉음에 휩쓸리지 말고, 그 안에 담긴 미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신성한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올해가 마침 푸른 뱀의 해인데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지각변동 속의 미세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경청의 세 단계-내면의 소리 경청, 경청의 소리 그대로 받아들이기, 경청을 실천하기-를 기억하며 올 한 해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들려주시는 신성한 목소리에 이끌리는 복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