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빛과 어둠 사이에서 – 2024년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요한일서 29-17

[교회가 탄생하기까지: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며]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예루살렘에 첫 그리스도교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에 오늘은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오늘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함께 만나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형제자매로 서로 교제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정말 귀하고 뜻깊은 날입니다. 그런데 첫 교회가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우선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은 제도나 조직, 건물로서의 교회를 만들 생각이 없었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배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자를 찾아다니시거나, 장로와 집사를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배의 순서를 짜거나, 헌금을 걷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가 빨리 오기를 갈망했습니다만 그건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문전(門前)에 당도(當到)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코앞에 오셨으니 이제 세상의 모든 질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사람들, 가난하여 늘 주눅 들어 사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병자들을 치유하고, 나쁜 영들을 쫓아내고, 외롭고 힘든 사람들, 삶에 지친 사람들, 떠돌며 주변부에 머물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시며 복음을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시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이 예수 곁으로 모여들고, 못된 권력에 신음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환호하자, 욕심 많은 자들, 남을 지배하고 제 맘대로 하려는 자들, 민중들을 착취해서 자신들의 배를 불렸던 로마나 유대의 기득권층들은 자기 지위를 잃을까 겁이 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예루살렘에까지 퍼지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해 버렸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말썽꾼”이요, “반역자”였던 예수를 처형했으니 이제 별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잠시 일었다가 사라져버리는 작은 돌개바람 정도로 여겼습니다. 예수를 처형할 때나 그 이후에도 군중들이 동요하지 않았고, 예수를 따르던 무리도 뿔뿔이 흩어져 눈에 뜨이지 않으니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상황이 변합니다.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에서 천사는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 전해 주었고, 실제로 예수님은 절망과 무력감의 늪에서 헤매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수 밥상을 차려 주시고, 양 떼를 먹이라는 분부를 내리십니다. 한편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모두 생각하도록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탄생했지만, 부활한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야 하는 공동체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 사역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어떤 곳이었나요? 거기는 자신들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첫 발걸음을 뗀 곳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일개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새 시대의 리더로 거듭나던 곳이 바로 갈릴리였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았던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조언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첫 마음, 첫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성전은 뿌리로부터 부패했고, 그래서 성전 지도자들은 성전의 부패를 비판했던 예수님을 모함하고 고소하여 십자가에 죽게 만듭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은 스승과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도시이고,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스승을 배신하고 도망가야 했던 부끄러움과 절망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원수의 도시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성공의 환호성을 울렸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치명적인 실패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바로 그 치명적 아픔의 장소에서 새로운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갈릴리에서의 진한 성취가 아로새겨 있고, 그 기억으로 절망의 예루살렘에서 희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과 불길로 오시는 성령과 사랑공동체의 탄생]

제자들은 지금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예루살렘 어느 골목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 배신한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다시 열둘을 채우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새롭게 세우고자 했던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고자 다짐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오순절이었는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온 집안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기운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고, 갈릴리 시골 토박이들의 입에서는 이전에 배운 적도 없던 언어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은 이 사건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으나, 어떤 이들은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부활이 제자들 각자에게 일어난 매우 실존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었다면,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깊은 회개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탄생한 이 새로운 공동체는 이제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실행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의 구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 중략 ~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2:42-47)

또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4:32-34a)

성령강림 사건은 세 가지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는 수직적 차원이요, 또 하나는 사람들끼리 통하게 되는 수평적 차원이고, 마지막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 온몸을 채우고 우주마저 채우는 깊이와 넓이의 차원입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하늘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막힘 없는 소통”, “회개 운동과 사랑공동체의 탄생”으로 요약합니다. 구약의 출애굽 백성이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것처럼 같은 오순절날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성령강림 사건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과 마음 판에 새기는 사건(렘 31:33)이었고, 요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준 것이었습니다.(욜 2:28)

[거룩한 영의 체험과 사랑]

한국에는 약 800만에 가까운 교인들이 있지만,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평적 차원에서 실패하고 있고, 아직도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이 지니는 깊이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세상 사람들은 수직적 차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을 두고 새로운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던 이들처럼 현대인들도 종교의 높이와 깊이에 무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강림을 통해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는 초월의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그 하늘의 불씨를 자기 내면에 채웠으며, 그 힘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한편으로 세상을 변혁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또한 어떻게 첫 그리스도인들의 성령 공동체를 본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일서의 말씀은 두 가지에 집중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세상과 하나님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역시 사랑의 계명입니다. 오늘 성경은 빛과 어둠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빛에 속한 사람은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가 쓰일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에 대해서 교회의 사도 전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가르쳤으나, 영지주의자들은 하늘에 있는 참된 지식을 깨달을 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지니신 신령한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고 깨우치게 하는 분이라고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전달해 준 하늘의 신령한 지식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예수가 사람이 된 것도 실제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또 임시적으로 육체를 입은 것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고 말하는데,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살을 가진 몸이 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맞서 요한일서 저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실제로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친교를 누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2:23, 4:2, 15, 5:1, 5) 그런데 요한일서 저자가 이것을 강조했던 현실적 이유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그 사랑을 모델로 삼아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도 퇴화되고, 형제자매끼리 사랑해야 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하늘의 신령한 지식만 얻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늘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에 구원받은 존재라고 하면서 육체와 눈의 욕망을 채우며,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을 일삼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영적 깨달음만 있으면 육체는 아무 상관 없다고 하면서 온갖 욕망을 충족하며 살았던 삶이 당대의 이단인 영지주의의 풍토였던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과 은유는 흔히 명석함과 어리석음으로 대변되기도 했습니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에서 헤매는 삶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밝고 훤한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지주의 사상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을 깨달은 자로 여기고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놀랍게 세상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통한 무지에서의 해방과 자유가 이 세상의 공적인 것과 남을 향한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어둠 속에 산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거룩한 영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하는 것은 바로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공부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을 배우고, 예배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예수의 사랑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세차게 불어온 거룩한 영의 바람을 쐰 사람들이 내놓은 열매는 열린 소통과 풍족한 사랑의 나눔이었습니다. 우리는 첫 교인들이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래서 그 누구도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고난을 견디고 세상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탁월하고, 성서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열심을 내어서 교회 봉사와 사회 선교 활동을 한다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남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보다 상대가 먼저 생각난다는 것을.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고, 상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상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공감과 소통을 전제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답답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로 소통하는 능력, 소통을 통해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했던 신령한 지식은 바로 사랑을 위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때 옳은 것이 됩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캐릭터로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한 것이 있습니다. 모처럼 만에 여러분에게 한 번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2016년도에도 사용한 예화입니다. 사오정이 그동안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취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력서를 자신 있게 내놓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성명: 사오정

◆ 본적: 누굴 말입니까?

◆ 주소: 뭘 달라는 겁니까?

◆ 호주: 가본 적 없음

◆ 성별: 사씨

◆ 신장: 두 개 다 있음

◆ 가족관계: 가족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음

◆ 지원동기: 지원이는 동기가 아니고 후배임

◆ 모교: 엄마가 다닌 학교라 난 모름

◆ 자기소개: 우리 자기는 아주 예쁨

◆ 수상경력: 배 타본 적 없음.

이렇게 이력서를 냈는데도 요행으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첫 월급을 타는 날 큰맘을 먹고 퇴근길에 족발을 사서 집에 왔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며 외쳤습니다. “와! 아빠 웬 족발이에요?” 그런데 사오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다! 왼쪽 발인가? 오른쪽 발인가?”

사오정의 특징은 단순히 귀가 먹은 것이 아니지요? 잘못 들은 것에 멈추지 않고, 문맥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엇을 묻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고칠 생각도 없지요. 이런 방식으로는 소통도 어렵고 결국 사랑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소통의 능력이고, 소통하기 위해서 지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중요한 것은 왜 소통하려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욕망의 바벨탑을 세우려고 할 때, 하나님은 소통의 언어를 막았지만,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서로 소통하고 나서 이들은 서로 자기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있고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놓이게 됩니다. 빛과 어둠은 명철한 지혜와 어리석은 무지의 상징어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대비한 것으로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 빛과 어둠을 사랑의 언어로 읽어내려는 종교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입니까? 사랑할 마음에 들뜬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빛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으뜸이 사랑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전하시기에 굳이 믿을 이유가 필요가 없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루어졌기에 소망의 언어도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여도 사랑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도 서로 사랑함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으뜸입니다.

내가 성령충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별하고 싶다면 지금 나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차근차근 생각해 보시고, 사랑의 마음을 얻으시길 빕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려면 우리가 연애할 때처럼 서로 충분한 사귐과 대화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면 저절로 사랑의 마음이 듭니다. 아가페 모임을 하면서 우리는 대화가 무엇인지 배운 적이 있습니다. 대화란 사랑하기 위하여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즉 진정한 대화는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일서 저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놀랍게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지식, 신령스러운 지혜를 얻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즉 자기 욕망에만 충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이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강력하게 경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빛을 쪼이지 못해서, 또 사랑할 수 없어서 어둠에 있는 이들도 있고, 어둠 속에 있다가도 사랑받아서 밝은 빛으로 나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빛과 어둠 사이에서 언제나 빛 가운데 머무시길 빕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머무르려면 끝까지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 한 가운데서만 언제나 빛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계속 새롭게 하시며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거룩한 영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옛날 출애굽의 역사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활약까지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도록 도우십니다.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가로막는 모든 담을 허무시고, 서로 소통하며 배려하며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에 사로잡힐 때,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만을 생각하는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납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가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의 빛 한 가운데 머물게 하소서. 그 사랑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어둠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을 빛으로 이끌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우리를 지켜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자녀로 담대하게 살겠다고 매 주일 다짐하지만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어느새 흐트러진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며 살겠다고 감사하며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평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침범합니다. 주님! 이 마음의 파도를 잔잔케 하소서. 몰아치는 광풍과 내리치는 폭풍을 진압하여 주소서. 주님 안에서 우리 영혼이 온전히 평화를 되찾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쉬시도록 우리 영혼이 고요함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오늘 주님 앞에 나올 때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을 드립니다. 이 감사의 예물 받아 주소서. 주님께 봉헌한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나는데 쓰이게 하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빛과 어둠 사이에서 헤매지 말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랑함으로써 언제나 빛 가운데 머무십시오.

* 축도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닌 것들을 굳건히 지켜주시고

거친 바다에서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육지에서도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빛으로 가득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서로 상대의 짐을 기꺼이 져 주고,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려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이끌어주시며

활짝 연 가슴으로 누구든지 맞이하는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