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오늘의 삭개오들에게 – 2023년 8월 27일
누가복음서 10장 1-10절
[창립11주년을 맞이하며]
오늘 우리는 생명사랑교회 창립 11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동서양의 고전 강의를 하면서 청중들에게 역사는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난 11년의 세월은 생명사랑 신앙공동체의 모험과 도전, 아픔과 시련, 환희와 감동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으나 건강한 교회로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평등한 주체로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여 주님께서 명하신 사역들을 감당해 왔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대가 요청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고 애썼습니다.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 수도 있는 11년 생명사랑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삶의 모양들을 지녔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넘치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뜨뜻미지근하지만 지속적인 신앙도 있고, 차분히 성찰하고 관조하는 신앙도 있지만, 나서서 과감하게 행동하는 신앙도 있습니다. 같은 성경 한 구절을 두고도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고, 깨닫고 감동하는 지점이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서로의 차이가 갈등과 불화, 분열과 다툼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보겠다는 다짐 속에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메꿔주며, 잘하는 부분들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처럼 앞으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참된 신앙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늘의 시대는 전통적인 종교 제도가 주었던 위로가 깊은 위기에 빠졌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세속적 분위기가 가득하기에, 그리스도교 신앙도 무관심의 안개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무신론으로 기울거나, 습관적인 신앙에 머물고 맙니다.
동트는 새벽 갈릴리 호숫가에 서 계셨던 떠돌이 예언자 나사렛 예수에게 지치고 좌절한 갈릴리 어부들은 이렇게 하소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심정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까지 져 보지만, 신학교들을 찾아오는 학생은 줄어들고, 교회의 주일학교는 텅 비어가며,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는데다가, 교회의 자정 능력 또한 의심을 받고 있기에 사회의 도덕성을 견인해 가던 화살촉과 같은 예언자적 그리스도교는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좌절하여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던 갈릴리 어부들에게 주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 당신들의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시오!”
생기 없고 무기력하며 불안과 두려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도 우리 모두는 주님 예수의 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손쉬운 무신론이나 습관적 신앙 같은 지름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순례의 길인데, 이 순례의 길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쳐 간 그 광야의 어둠을 지나야 합니다. 순례자는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때로 길을 벗어나 헤매기도 합니다. 다시 길을 찾기 위해 깊고 그늘진 골짜기로 내려가야 할 때도 있고, 바닥 모를 수렁에서 몸부림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진정 거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껍데기에 머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그리스도교는 깊은 데로 가서 우리들의 그물을 거기에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맞서서 850대 1로 싸워 이겼지만,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느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왕상 19:7)
오늘 저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사회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 그래서 지독한 소외감과 외로움에 사무치고, 실존적 내면으로부터 뜨겁게 타오르는 영적 갈망을 풀고 싶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11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앞으로 어떤 목회와 선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삭개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삭개오는 잃은 것에 포함됩니다.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들이나 산에 남겨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오늘의 시대는 한 마리의 양만 목초지에 잘 있고, 아흔아홉마리가 길을 잃은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뒤에 주님을 따라가서 제자들 무리에 속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 추종자들 사이에서 인사이더에 들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며 환호하는 군중들 무리에도 끼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작은 키’라고 표현되는 열등감 속에서 그 어느 성인(成人)도 올라가지 않는 뽕나무에 올라 나뭇가지 사이 한구석에 몰래 자리 잡고 숨죽이며 예수를 엿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 집에 머물러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실컷 누리면서 자기 인생을 즐길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대중들의 인식 속에 그는 죄인이고, 강제로 빼앗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 강제로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은 절대로 강제로 빼앗은 적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항변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삭개오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일 뿐! 세상의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듯 예수님께서 활약하시던 시절 세금 받는 일을 맡은 세리들은 동족의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기 때문에 많은 유대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던 유대인들의 돈이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종교적으로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세리들이 바로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보통 세리들은 로마가 걷으라고 할당한 적당량의 세금을 걷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세금을 걷어서 자기가 중간에 착복했기 때문에 더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세리들 중 우두머리인 세관장입니다. 그는 아마 여리고 전체 세관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미움을 받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죄인 취급 당했습니다. 삭개오가 정말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어땠는지는 전혀 확인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동시에 삭개오는 부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부를 함께 움켜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여전하고, 그런 상황에서 그 둘을 모두 가진 사람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한편으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부와 권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로 자신도 부자가 되고 싶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떵떵거리면서 남들을 부리며 살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그런 자리는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인 권력을 동시에 잡은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다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 뿐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두고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수군대고 욕도 합니다. 한편으로 부러워하면서 그 자리에 가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하고 뒷담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기와 질투, 편견과 오해 속에서 중심부에 들지도 못하고, 동시에 다수의 군중 속에도 끼지 못하는 주변부 사람! 하나님은 없다고 확신하면서 세속의 가치에 전념하는 무신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고 확실하게 믿으며 기존의 신앙을 굳게 고집하는 근본주의 신앙인도 아닌, 언제나 적절한 거리 속에서 늘 의심과 불안을 간직한 채 멀리서 그저 수줍게 바라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이 삭개오의 특징은 현대인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많은 것을 이룬 듯 하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이들 중에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고 비어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채울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어서 그것이 언제나 발목을 잡는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작은 키”이지요. 저도 어릴 때 무척 키가 작았는데, 보통 이런 사람은 땅딸보나 땅꼬마라고 놀림을 당하기 쉽지요. 몸이 작기 때문에 덩치가 큰 친구들로부터 자잘한 신체적 괴롭힘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만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집착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어쩌면 삭개오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을 것이고, 그 결과 부자가 되고 세리의 장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은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하고 엄격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는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꼭 삭개오 같지는 않을 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 속에서 무언가 풀리지 않는 자신만의 고민과 어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사이더도 되지 못하고, 군중들 사이에도 들지 못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10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양 문명이 자리를 잡았고, 그동안 한국인들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에 내몰리면서도 그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자신에게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남이 쥐고 있던 채찍을 가져와 자신이 쥐었기 때문에 자유를 획득하였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이끌어 간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스스로 몰아치는 삶 속에서 우리 모두는 지치고 우울해졌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마저도 남김없이 모두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남들 눈치 보며 눌러 왔던 욕망들이 여전히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비교 속에서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이 자기를 사로잡을 때는 술이나 진탕 먹고 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너무나 급속하게 커져 버린 자본주의의 세력은 돈을 빌미로 사람들의 자존심과 존엄을 망가트리는 일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모멸감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자기를 외톨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실로 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또는 본인이 원치 않아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삭개오가 됩니다. 예수 추종자의 핵심에 들고 싶고, 군중과 함께 환호하며 외치고 싶지만 그럴 용기나 힘도 없이, 그저 뽕나무 위 나뭇가지 사이에 자기를 숨기고 엿보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누군가 불러만 준다면 언제든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은 가득합니다. 물론 또 거기에서 상처받고 가슴 아픈 일 생길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뽕나무 위로 기어오른 이유는 그만큼 소중한 관계에 대한 갈망과 열망이 크고, 외로움이 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길을 잃은 현대인들은 뽕나무 위에서 누군가 자기를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의 시선을 따라]
오늘 삭개오 이야기에서 결정적 장면은 5절에 있습니다.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서 뽕나무에 오르고, 그 길을 지나치시는 예수를 기다렸던 삭개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나 드라마라면 모든 시청자들이 숨죽이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지요. 만약 예수가 그냥 지나쳐갔다면 이야기는 맥이 빠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대한 대로 예수의 시선이 삭개오를 향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 이르셔서 고개를 들고 삭개오를 쳐다봅니다.
누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시선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시고(5:27), 또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축복하시며(6:20),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보시고 그 아들을 일으키시며(7:13-15), 18년 동안 병마에게 사로잡힌 여인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십니다.(13:10-13), 높은 자리, 윗자리를 골라잡는 사람들을 보시고 훈계하시며(14:7-11), 부자 지도자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시고 교훈을 주시며(18:24),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우시며(19:41), 자기를 위해 우는 여자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위로하시며(23:28), 자기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시며 그의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22:61) 이 밖에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을 따라가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십니다. 삭개오 또한 예수님을 보려고 달려와 나무에 올랐고, 예수님의 시선과 삭개오의 눈길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눈빛을 통해 그의 외로움을 알았고 그의 집에 머물기로 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눈빛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새로운 삶에 기대를 갖게 됩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시일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꽃을 보듯 너를 본다.> 풀꽃 1. 나태주 시집) 휘몰아치는 변화 속에서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런 시선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볼 줄 모르고 오래 볼 줄도 모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忙)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어버립니다(忘). 자세히 오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허망(虛妄)한 것들을 쫓습니다. 찬찬히 머무는 시선이 아니라 두리번거리는 산만한 시선으로 가득하기에 자꾸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오래 보아야 얻을 수 있는 구원에 다다르지 못하고, 자꾸자꾸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따라 우리에게 눈길을 주시는데, 놀랍게 우리는 다른 곳을 봅니다. 우리의 눈길은 주님을 향하기보다, 당장 내 앞에 닥친 문제를 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지 않고 물결 위 바람을 보았을 때에 물에 빠진 것처럼(마태 14:29-30) 우리는 주님 대신 다른 것을 보면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시선을 아예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린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예수의 시선, 하나님의 눈길을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삭개오들이 오늘날 가득합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엉망이 된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내 삶에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참되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마음은 있지만 뭔가 아직도 준비가 덜 된 듯하여 망설이는 사람들, 종교적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영적 갈망을 풀고자 순례의 길을 떠나고 싶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나무가지 사이에 숨어 웅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구도자(求道者)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질문이 많습니다. 의문의 구름 덩어리가 늘 뭉개뭉개 피어오릅니다.
[생명사랑 목회와 선교의 미래]
앞으로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선교는 바로 이런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그럴듯한 선전 문구나 달콤한 유혹으로 남들의 약점을 공략하는 선동가가 되어선 안됩니다. 교회는 정치인들이나 장사꾼들처럼 새로운 물건에 관심을 주목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선교는 중심에서 벗어나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에 눈길을 주고 그들을 자세하고도 오래도록 바라보며 그들 곁에서 함께 진리를 향한 긴 순례의 여정을 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더 깊은 질문을 던져서 이전 질문이 해소되는 경험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이전에 확실하다고 느꼈던 모든 신앙의 언어들을 과감하게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말로 하는 것을 버리고 몸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결국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박하고 너무나 뻔한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쇼핑몰에서 상품을 선전하듯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삭개오 방문은 존재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모신 덕에 자신의 응어리진 마음을 드러내 놓을 수 있었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수군거리는 남들의 험담과 모함에 초연하게 됩니다. 예수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삭개오는 오랜 시간 가장자리에서 견디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눈길을 자기 안에 담아내기 위한 긴 준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안에 바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눈길과 예수의 방문 또한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는 세상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 웬만한 태풍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깊은 바다 같은 신앙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바다는 그 품이 넓습니다. 바다가 어떤 강도 거부하지 않기에 바다가 될 수 있었듯이, 세관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의 집에 편하게 들어가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는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우리 뇌부터 시작해서 엄청나게 큰 우주의 비밀까지도 풀어내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닮아 인간 닮은 로봇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전쟁 직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 열 명 중 두세 명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에 비해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입니다. <OECD 교육지표 2022>라는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25-34세까지 청년층의 교육 수준이 제일 높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세상은 복잡해지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이들을 상대로 목회와 선교를 하는 일은 예전처럼 단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장기적인 과제에 대해 단기적인 해결책을 내어놓으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만 나올 뿐이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복합성, 변화에 알맞은 복음이 나와야 합니다. 강력한 세속화는 종교의 변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선교와 목회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합니다.
한편 복잡성이 늘어가는 세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당시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바닥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시선을 가지고 이들 곁에서 이들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그대에게 당신은 우리 형제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대는 그들에게 당신은 우리 형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형제자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확실성을 넘어서서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의심의 강을 넘어서 확신의 육지로 가서는 안 됩니다. 소용돌이치는 의심과 불안, 불확실의 폭풍 속에서 돛대를 잡고 노를 저어가며 맞서서 씨름해야 합니다. 풍랑의 바람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떤 방향으로 부는지를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너무 쉽게 안주하려 하지 말고, 참아내면서 마음을 단련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삭개오라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무에 기어 올라가려는 그 영적 갈망을 결코 놓치 마십시오. 주님이 지나갈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활짝 그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이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경계선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 도저히 못믿겠다는 자들과 너무 확실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들에게 눈길을 주고 그들 곁에 있어 보겠다고 제안하십시오. 잃은 자를 찾아 나서서, 구원이 이르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길에서만이 영원한 신비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세월 우리에게 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고 크고 깊습니다. 열한번째 생일을 맞으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다시 꿈꿉니다. 삭개오를 찾아 오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눈길을 주시고, 네 집에 머물겠다 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우리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소서. 주님을 기억하며 모인 이 자리가 생명을 살리는 자리, 사랑이 넘쳐나는 자리, 굳센 믿음으로 희망을 간직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지경을 넓혀서 잃은 자들을 찾아 나서게 하시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구원의 소식이 들리게 하소서. 특별히 자본과 권력이 신이 된 세상에서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도록 참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의 검을 들고 나가 새로운 시대 새 그리스도교를 열어가게 하소서. 탐색하고 도전하는 일에 지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