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좋은 이웃 – 2023년 7월 30일
오바댜서 1장 10-18절
[훈훈한 소식]
뉴스를 보다가 훈훈한 소식 하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68세의 한 택배기사가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 배달을 하다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함께 일하던 아내가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고 심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택배기사의 아내는 택배를 기다렸을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00택배 기사입니다. … 오늘 배송중, 저희 아저씨가 심장이 안 좋다고 하여 응급실에 왔습니다. 지금 심장 수술 중입니다. 부득불 오늘 배송은 못하게 됐습니다. … 조속히 낫는 대로 배송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일일이 문자까지 다 보내는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아파트 주민들에게 전해졌고, 이 소식을 알게 된 아파트 주민들은 단체 카톡방에 이 사실을 공유하고, 병원비 모금에 나섭니다. 이틀 만에 100세대가 넘게 모금에 참여하였고, 총 248만원이 모였습니다. 주민은 작은 편지와 함께 이 돈을 전달하였고, 택배기사 부부는 입주민들이 건넨 성금을 받았을 때 눈물이 났다며, 나이가 많아 택배 배송이 빠르지 않고 또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그동안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오히려 이렇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는 내용입니다.
뉴스만 틀면 들려 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에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나를 생각하다가도 이런 소식을 들으면 정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에돔의 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오바댜서는 한 장 밖에 안되는 매우 짧은 예언서입니다. 내용도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의 이웃 민족인 에돔은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앞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잘 나옵니다. 주전 587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할 때, 이웃 나라였던 에돔은 바벨론의 편이 되어,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백성을 조롱하고, 약탈했습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이들이 벌인 짓은 나라의 멸망이라는 극한의 참사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적개심을 보이며 조롱하던 말들은 시편 137편 7절에도 잘 나옵니다. 시인은 주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님,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그 날에, 에돔 사람들이 하던 말, ‘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 하던 그 말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에스겔서 35장에도 에돔의 패악한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한을 품고 있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재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그 지은 죄로 심판을 받을 때에, 너는 그들 위에 칼을 휘둘렀다. ~중략~ 너는 나 주가 유다와 이스라엘을 돌보는데도 감히 말하기를, 그 두 민족과 그 두 나라가 네 것이 되고 네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중략~ 네가 또 이스라엘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해졌으니, 너희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며 조롱하였지만, 내가 너에게 보복하는 날, 너는 네가 조롱하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입을 벌려 나를 거슬러 허풍을 떨고, 나를 거슬러 빈정대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다. ~중략~ 이스라엘 족속의 소유가 황폐하게 되었다고 네가 기뻐했던 것과 똑같이, 나도 너를 그렇게 만들어 놓겠다. 세일 산과 에돔 온 땅아, 네가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겔 35:5, 10, 12b-13, 15)
오늘 읽은 본문과 방금 말씀드린 성서 본문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와 에돔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 보입니다. 그런데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이들은 쌍둥이 형제 관계였습니다. 바로 에서와 야곱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돔을 형제처럼 생각했는데, 그런 에돔이 이와 같은 짓을 하였기에 이스라엘과 유다 주민들은 더욱더 상처가 컸던 것입니다.
어쩌다가 형제국으로 지내던 나라들이 이렇게 원수가 되었을까요? 원수 사이의 관계를 풀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오바댜 예언자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와 국권이 회복될 때, 야곱의 집은 불이 되고, 요셉의 집은 불꽃이 되어 검불과 같은 에돔을 완전히 불살라 없애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만, 이렇게 계속되는 복수혈전은 양 나라 모두에게 더 깊은 골만 만들고 결국 양국을 모두 황폐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어느 한쪽을 용서하고 다시 화해하려면 진실한 사과와 그에 마땅한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행동이 없다면, 용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일본을 함부로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이유]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우리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만, 미국 UCLA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균·쇠>라는 책에서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규정합니다. 그는 일본 민족은 기원전 4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 북큐슈로 건너가 벼농사를 중심으로 집약 농경을 영위하여 야요이(彌生) 문화를 성립시켰던 한반도 이주민들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기원전 400년경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바로 수렵채집사회가 농경사회로 바뀐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홋카이도(北海道) 아이누인의 후예이며, 한반도로부터 농업 기술을 배워서 농사를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것은 틀린 이론이라면서, 방금 말씀드린 대로 한반도에서 북큐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농업을 짓기 시작했고, 그것이 일본 전역으로 퍼졌으며, 지금의 일본인들은 바로 이때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대단히 많은 고고학적 증거뿐만 아니라 체질 유전학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매우 신빙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일본 돗토리 대학 다카오 교수 연구팀은 DNA 유전자 연구를 통해 실제로 일본인의 뿌리가 한국계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한반도보다 주민의 수가 세배나 많아지고, 비옥한 토양에서 농업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일본이 한국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의 국토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잦은 지진과 화산 폭발의 위험, 지진해일, 지각판 변동에 의한 열도 침몰 시나리오 같은 것들이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습니다. 대륙에 대한 야욕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나 삼국사기에도 끊임없이 왜가 침략했다는 내용이 있고, 1592년부터 98년까지 7년동안 조선을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 35년간의 식민 지배라고 하는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강도가 집안으로 들이닥쳐 자기 가족을 죽이고 가진 것을 빼앗고 자녀들을 종으로 삼은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이 극악무도한 짓을 하고도 일본은 동아시아 나라에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그 이후 우리 역사가 끊임없이 뒤틀리고 왜곡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강점 통치가 없었다면,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도 없었을 것이고, 미군정도 없고, 제주 4.3의 비극이나 여순민중항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빨갱이라는 말이 등장할 이유도 없고, 반공 이념이 국시가 될 이유가 없고,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전 세계를 미소 냉전의 이념 대결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고,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드는 태극기 부대도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낡은 이념으로 대결하는 매우 소모적인 논쟁과 정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패망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며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데, 지금 일본은 또 핵 폐수를 바다에 투기하여 가장 가까운 우리를 비롯하여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범죄인 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독일과 일본의 죄악은 함부로 용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독일은 편의상 반나치법이라고 불리는 「형법」 제86조와 제86조a, 제130조 제3항, 그리고 <나치 정권 하의 형사재판 불법 판결 파기를 위한 법률>을 통해 전쟁 범죄 이후 끊임없이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전 세계인들에게 사죄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1970년 12월 7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나치에 의한 희생이 컸던 폴란드를 방문합니다. 일정 중 하나가 약 2천명의 폴란드 시민과 함께 무명용사의 무덤에 가서 화환을 바치기로 한 것이었는데, 브란트 수상은 그곳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유대인 게토봉기(1943년 4-5월: 이 봉기로 인해 유대인 1만 3천명이 사망함)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에도 헌화할 것을 고집합니다. 브란트는 게토기념비에 헌화를 하고 한 단을 뒤로 물러나 빗물에 젖어 있는 바닥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약 14초 정도 묵념을 합니다.(Brandt Kniefall) 이 사건 때문에 보수 우익들로부터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이 장면은 독일의 양심적 언론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빌리 브란트 수상의 진심 어린 사죄의 모습을 통해 유럽은 독일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유럽의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힘으로 독일은 통일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독일은 유럽 연합에 속한 많은 나라들의 좋은 이웃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에게 좋은 이웃이 아닙니다. 일본이 좋은 이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 사람 개개인을 만나 보면 사람들이 매우 배려심이 깊고, 친절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일본을 가 보면 도시나 마을도 매우 깨끗하고 단정합니다. 그들의 학문 수준도 매우 높고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국제사회에서 하는 짓들을 보면 인류를 향한 보편적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을 생각하는 매우 편협한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일본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한 일본은 결코 아시아 국가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본에게 굴종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우리는 일본이 도덕성을 회복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해야 합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정확하게 하도록 하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평화헌법을 지키게 하고, 핵 폐수를 해양 투기를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이웃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좋은 이웃 되기]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 곁에 좋은 이웃이 있나요? 좋은 이웃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좋지 않은 이웃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방금 우리는 일본이 지금 왜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없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 인류 보편이 지향해야 하는 양심을 상실하고, 자국의 이익에만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인간은 결코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적 삶의 방식이 전 세계적 표준처럼 되어 있는 시대에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율적 개인입니다. 현대를 연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이후 서구 사람들은 능력 있는 자율적 개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니라 돈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세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데 관심을 두고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돈으로 자아실현을 하려고 하는 이들이 현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서구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전 세계로 퍼져가면서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더욱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움과 애정 결핍, 불행을 느끼면서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매우 미숙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나만의 일을 할 자유와 나 자신이 될 자유, 나를 표현할 자유와 나를 옹호할 자유를 추구했는데, 이것의 결과는 과도한 자기도취 현상을 가져왔고, 참된 자유를 얻는 대신 자아 숭배라는 우상 숭배와 이기심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기를 채찍질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듯한 환상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기력하게 되고, 피로해지고, 우울증에 걸리는 일들이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만난 사유재산권 인정은 가난한 사람이 빵 한 덩어리 훔치는 것은 불법으로 여기면서도, 부자가 엄청난 재화를 넘치도록 쌓아 두는 것은 합법으로 여기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수십억 생명이 하루에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생활하다가 굶어 죽을 위기에 있는데도, 몇몇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돈을 쌓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부의 불평등은 우리 사회를 양극단으로 몰면서 더 위험한 사회, 분노와 혐오를 부추기는 사회로 만들었고, 개인주의적 욕망의 무한 추구는 지구 생태계 자체를 파괴해서 모든 생명을 죽음의 그늘로 몰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통해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가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마주하는 모든 것을 끊어낼 수 있는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모든 것은 홀로 할 수 없습니다. 나 개인이 아닌, 나와 너 그래서 만들어지는 우리,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결국 나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공동체는 필요합니다.
공동체에는 나와는 다른 남이 있고, 내 앞에는 상대자인 너가 있습니다. 나와 남은 다르고, 나와 너도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A에게 있는 것이 B에는 없고, B에게 없는 것이 A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가 비어 있는 사람 즉 충분하거나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줄 때 우리는 보다 완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채우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과도한 개인주의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 물들고,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들은 내 것을 나눌 줄 모릅니다. 남의 것을 가져오려고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외톨이가 됩니다. 외톨이가 되어 허전한 그 빈구석을 메꾸려고 돈이나 권력, 술이나 마약, 특별한 물건에 집착해 보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쫓으면 쫓을수록 더 커지기만 하는 것이 바로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과 월요일에 1박 2일의 어린이 청소년부의 성경학교 공동체 활동이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보내는 1박 2일이기에 교사와 식사를 돕는 학부모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전부 33명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기에 손이 바쁘고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매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활동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어린이 청소년들도 매우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의 몸을 드리고 시간을 내어서 참여한 어른들도 함께 사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남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것을 내어 줄 때, 남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상호의존 관계를 맺을 때에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져 주려고 합니다. 주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손익을 따지며 하는 투자나 장사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저 주는 것입니다. 주다 보면 받는 것도 생기기 마련인데,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체험합니다. 거저 주고 은혜로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좋은 세상이 됩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이웃이 많을 때 바로 그때 우리의 삶이 나아집니다. 서로 믿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야말로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 자산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급격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앞으로 인류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좋은 이웃을 많이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좋은 이웃을 많이 가지려면 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좋은 이웃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게 하여 주소서. 고통을 당한 이들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고 성심성의껏 돌보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배우게 하여 주소서. 이웃의 고통에 방관자가 되지 말며,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양심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고 주님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거저 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굳게 간직하게 도와 주소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기 추구의 감옥에서 탈출하게 하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득 부어 주소서. 우리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좋은 이웃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자연에게도 좋은 이웃으로 남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님 부활하신 날을 기억하여 나머지 날들의 완성으로 삼으시고, 또 새로운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시어, 세상살이에서도 거룩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님을 더 잘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일들을 좀 더 부지런히 감당하게 하시며,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소서. 우리가 드린 예물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