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마음을 찢어라!” – 2023년 7월 16일

요엘서 212-17

[장마 한복판에서]

지금 우리나라는 긴 장마 한 가운데 있고, 곳곳에서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여름 장마는 늘 계속되는 것이지만, 그 양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 백 년 사이 우리나라는 여름이 한 달이나 길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을과 겨울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5월은 봄의 여왕이라고 불렸으나, 이제 5월이 여름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가무는 지역과 비가 많은 지역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많은 비가 오는 지역에 속합니다. 대기천(Atmospheric river, 大氣川)이라고 하여 많은 물을 머금은 구름이 하늘에서 강처럼 흐르다가 순식간에 쏟아붓는 현상이 늘고 있고, 이번 장마에서도 예전과 같은 지리한 장마뿐만 아니라 한 지역에 매우 짧은 시간에도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여름 장마뿐만 아니라, 가을장마도 자주 겪게 될 것이고, 슈퍼태풍과 국지성 집중호우로 인한 도심 속 홍수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자연재해의 반복은 우리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땅이 유실되고, 전기가 끊기고, 교통이 마비되고, 침수 피해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에서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와 재난 대응 시스템을 다시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지만, 개개인의 주의와 안전에 대한 민감성도 매우 필요한 시기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계속 장마가 지속된다고 하니 여러분들도 각별히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인류에게 닥친 곤경과 재난은 인류에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더라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도 사실은 큰 재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뚜기 재앙입니다.

[메뚜기 재앙과 요엘]

오늘 우리는 예언자 요엘에게 임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요엘이라는 이름이 12번이나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도 예언자 요엘과 동일 인물은 아닙니다. 예언자 요엘과 관련한 정보는 요엘서 말고는 다른 곳에 전혀 나오지 않는데, 요엘서에도 요엘의 아버지가 브두엘이라고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엘이 “야훼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이라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또 요엘서가 어느 시대에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었는지도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단지 요엘서를 읽어나가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예언자 요엘은 이스라엘 전역을 황폐하게 만든 극심한 가뭄에 이은 메뚜기 재앙을 다룹니다. 요엘서 1장 4-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갉아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말끔히 먹어버렸다. 술을 즐기는 자들아, 깨어나서 울어라. 포도주를 좋아하는 자들아, 모두 다 통곡하여라. 포도 농사가 망하였으니, 새 술을 만들 포도가 없다.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군대가 우리의 땅을 공격하였다. 그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날카롭기가 암사자의 송곳니와 같다. 그들이 우리의 포도나무를 망쳐 놓았고, 우리의 무화과나무도 그루터기만 남겨 놓았다. 나무껍질을 다 벗겨서 그 줄기가 모두 하얗게 말랐다.”

엄청난 메뚜기 떼가 몰려와서 거둔 곡식을 다 잃었을 뿐만 아니라, 초목 전체가 파괴됩니다. 메뚜기의 종류를 네 가지나 언급하고, 그들의 이빨이 사자의 송곳니 같다는 비유를 통해서 이 재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드러냅니다. 고대 근동에서 5-7cm나 되는 메뚜기 떼의 공격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요엘이 기억하는 이 메뚜기 재앙은 특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언자 요엘은 이런 엄청난 재앙을 1장 내내 묘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오시는 야훼의 날에도 메뚜기 재앙보다 더한 날이 올 것이라 예언합니다. 2장 1-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나팔을 불어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유다 땅에 사는 백성아, 모두 떨어라. 주님의 날이 오고 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은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에 뒤덮이는 날이다.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군대가 온다. 마치 어둠이 산등성이를 넘어오듯이 새까맣게 다가온다. 까마득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일은 없었다. 앞으로 천만대에 이르기까지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불처럼 초목을 삼키고 지나가면, 지나간 자리에서는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이 땅이 에덴 동산 같으나, 한 번 지나가고 나면 황량한 사막이 되어 버린다. 그 앞에서는 살아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떼지어 몰려 오는 말과 같고 달려 오는 군마와 같다.”

요엘은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2:12-13a)

[마음을 찢어라]

요엘은 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자연의 모든 현상을 신앙적 관점에서 읽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한 자연재해나 정치 경제적 분쟁과 전쟁 등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딴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성과 장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도 다 불러 모으고, 심지어 방금 결혼한 신랑 신부도 나와서 전부 금식하며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요엘의 이런 경고와 예언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속화된 세계는 자연현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인간사를 하나님과 연관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엘 예언자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실로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사건 사고, 가장 시급한 기후 재앙의 문제도 우리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보존이라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푸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엄청난 폭우와 세게 몰아치는 태풍을 잠재울 수 없을지 모르지만,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뒤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독이고 정리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반복된 실수와 잘못을 하지 않는데 큰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기후 재앙이 우리의 삶의 습관과 연결되어 있기에,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요엘의 예언은 매우 촌철살인과 같은 적확한 경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재난과 위기들은 분명히 우리 삶에 대한 전적인 돌이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계속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인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습득한 이후 수백년동안 인간의 유익과 편리를 위해 지구의 모든 자원과 자연환경을 거침없이 이용하고 개발해 왔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문명의 진보가 일어날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커졌고, 지구가 유한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채, 인간의 영역을 무한대로 펼쳐 가려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인류는 끔찍한 위기 앞에 당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무한성장은 불가능합니다. 무한성장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생명은 태어나서 자라고, 성체가 되어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면 다시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문명 또한 그것이 지속되려면 계속 자라나려고 하는 생각은 포기해야 합니다. 적절한 상황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에는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고 하는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고, 죽어야 생명이 지속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가 못 견디는 상황인데도 우리가 계속 성장하고, 살려고만 하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결국은 우리도 죽게 될 것입니다. 마치 멈출 줄 모르고 자라는 암세포가 몸을 죽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요엘 예언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옷을 찢는 행위는 슬픔과 비통함의 표시입니다. 나라가 망한다든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든지 하여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참척의 슬픔 가운데에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찢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와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오는 죄책과 수치심, 슬픔으로 인해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언자 요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표현입니다. 옷을 찢는 것이 단순히 겉치레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옷을 찢어서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드러낸 뒤에 어떤 삶의 변화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찢으라는 말은 진정한 회개에 이은 삶의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변화의 시작: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을 깨우침]

우리의 지속적인 삶을 위해 생태적 회심과 상생과 공존의 삶으로의 변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면, 이것 말고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마음을 찢고 변화해야 할 것들이 실로 산적해 있습니다.

많은 것 중에 우리가 가장 먼저 마음을 찢어야 하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익히 종교개혁자 깔뱅이 말했듯이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4-5a)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 즉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또 그럴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 어떤 모양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형상으로도 본뜰 수도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존재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유한 속에 담기는 순간 하나님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신의 안정과 평안, 고난의 극복, 고통의 해결을 위해 자기 나름의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두가 성경이 그렇게 경계하는 우상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상숭배를 피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을 마치 하나님의 전부인 양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방식의 하나님 체험에서 머무르려고 합니다. 실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비워서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나 자신을 열어놓고 내려놓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할 때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상을 타파하는 신앙이란 그 어떤 것이 보이지 않아도, 기대할 것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알 수 없는 미래로 과감하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인데, 그때의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도저히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바위요 요새이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특별히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등 하나님 앞에 엄청 많은 인간의 언어로 덧씌웁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찬사와 체험 속 언어들이 사실은 전부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선 어떤 한계에 잡힐 수 없는 분을 인간의 언어로, 또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하나님 체험으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신 하나님보다 언제나 크다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헤아림을 넘어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우리는 우상숭배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과 내 체험 안에 가두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상대해 주시고, 우리와 세계의 상대자로서 자신을 내어 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적인 존재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우리를 상대해 주시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지만, 절대자를 상대자로 만드는 것, 내가 생각하고 이해하고 만난 그런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그런데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고 목회자가 자신이 만난 하나님, 하나님 만났다고 여긴 자신의 체험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붙잡을 수 없는 분인데, 붙잡았다고 느끼는 부분만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붙잡히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크지만 작디작은 경험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 안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깊은 신앙인이 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넘어서 더 큰 하나님의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어요”라고 간증했던 사람은 모두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내가 만난 하나님일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고백이 이렇게 바뀔 때, 우리는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탓을 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내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찾아 주시지 않는가고 묻는 대신 내가 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렇게 물음이 바뀌고 깊어지면 내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적 같은 일, 초자연적 현상에서만 하나님을 찾던 사람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곳에 계셨지만 자기가 딴 곳에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이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사실 문제의 핵심은 나였다는 진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수요사경회에서 성서를 보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성서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 양식으로 되어 있고, 매우 많은 사람이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맥락 속에서 쓴 것들인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인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만 따지면서 성서가 우리 삶에 주는 풍성한 의미를 전부 사장시켜 버립니다. 이런 습관을 고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관점, 자신이 그동안 읽어왔고 믿어 왔던 확신을 절대로 바꾸러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획일적으로 읽던 사람이 돌이켜서 다시 성서를 볼 수 있다면 그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참된 신앙인들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40년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한 번도 다투지 않은 두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들은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사가 다른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제 한 번쯤 다툴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떻게 생각해?”

다른 수도사가 대꾸했습니다.

“좋아, 당장 해 보자고! 무얼 가지고 다툴까?”

“이 빵 조각 어때?”

“좋아. 그럼 이제부터 이 빵 조각을 놓고 다투어보자고! 자네가 시작하게”

한 수도사가 다툴 마음을 단단히 먹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건 내 꺼야, 내 빵이라고!”

그러자 다른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그 빵을 먹게나!”

(앤소니 드 멜로 지음, 이현주 옮김, <행복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도서출판 샨티, 2012, 37쪽 각색)

과연 이 수도사들이 다툴 수 있을까요?

우리말 성서에서 “회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라는 그리스어를 분석해 보면 “한 발 물러서 생각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가진 신앙을 한발 물러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야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진짜 관심을 둔 것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나입니까? 나의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만 생각해 보아도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 것인지, 과연 나를 섬긴 것인지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여태까지 우리는 내가 살아남고 하나님은 온 데 간 데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설교 초두에 말씀 드렸지만, 요엘의 이름은 “야훼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야훼가 하나님이시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야훼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은 하면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이다.”하면서 산 것은 아닐까요?

수술을 하려면 배를 갈라야 합니다. 그래야 수술할 부위가 잘 보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수술하려면 우리 마음을 갈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발 물러서서,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그것을 하나님께 덧씌운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골수를 쪼개고 갈라내어서 정말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동안 교회를 다닌 것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혹시 나를 믿었기에, 내 생각, 내 바램을 하나님께 투영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피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야훼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예언자 요엘은 우리에게 마음을 찢으라고 말합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예언자 요엘의 외침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과연 무엇을 추구하였는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마음을 찢으며 우리의 삶과 신앙을 성찰합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아픔을 느끼며, 지구가 우리에게 하는 경고를 듣고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가 새롭게 변화하도록 주님! 우리 곁에서 도와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장마가 전국적으로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사고 소식도 들리고, 비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장마가 그치고 다시 일상을 회복할 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모두가 서로 돕는 마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나의 고집과 아집, 편견과 무지를 깨고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신 은혜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우리 마음을 살펴봅시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읍시다. 그리함으로 우리 모두 함께 거듭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마음을 살피고 삶을 살피며 참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전국 각처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