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깊은 강에 인생을 실어 – 2023년 4월 23일
욥기 40장 1-14절
[욥기를 펴서 읽어라]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經典)입니다. 일반인들에게 성경은 여러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요,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밝혀 주는 보물창고입니다. 성경을 앞에 두고 매일 주님의 뜻을 묻는 신앙인은 말씀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를 통해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얻으며, 절망의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고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고, 좋은 진주를 구하는 한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곁에 둘만합니다.
제 후배 중에 독일의 철학자 헤겔을 전공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의 집에는 헤겔과 관련된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종종 재밌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자기 집에 불이 난다면 우선 헤겔 전집부터 챙겨 나올 것인데, 다 가지고 나올 시간이 부족하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만이라도 들고나오겠다고 합니다. 헤겔을 공부하고 싶은데, 너무 시간이 없다면, 다른 것은 다 읽지 않아도 좋으니, 『정신현상학』의 서문만이라도 읽으면 된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싶은데, 너무 두꺼우니 그중에 하나만 택하여 읽고 싶다면 여러분은 66권 중에 무엇을 추천하시겠습니까? 게다가 성경을 읽겠다는 사람이 하나님께도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믿을 생각도 전혀 없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시겠습니까? 인생의 기쁨과 아픔, 고난과 역경, 성취와 실패, 승리와 좌절을 노래로 읊어낸 시편이나, 고대 중동의 왕국에 살던 현인들의 지혜가 가득 담긴 잠언과 전도서를 추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 문명사에서 시대를 바꾼 이들이 읽었던 바울 사도의 로마서를 추천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 누군가가 제게 이런 부탁을 한다면 저는 단연코 욥기를 추천할 것입니다.
욥기야말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종교가 있든 없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웠든 못 배웠든 아무 상관 없이,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억울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한숨을 쉬며 가슴을 친 적이 있다면, 도대체 산다는 게 뭔지, 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본 사람이라면 한번 욥기를 읽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리석음과 지혜]
저의 추천을 듣고 누군가 욥기를 펼쳐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처음에는 술술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옛이야기 같습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고, 종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1:1-3)
책을 펴자마자 주인공 욥이 등장하는데 아주 완벽해 보입니다. 흠이 없습니다. 자녀도 아들딸 합쳐서 10명, 양과 낙타를 합쳐서 만 마리, 겨릿소 천 마리, 암나귀 오백마리. 성경은 완전수인 7, 3, 10이라는 숫자들을 나열하면서 욥의 형편이 지금 얼마나 환상적인지 보여줍니다. 욥은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인데, 정직하고 흠도 없고 악을 멀리하는 데다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자녀들이 혹여라도 실수할까 조심하며 자식의 수대로 일일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인물입니다. 성경은 욥이 모든 일에 신중하였다(1:5)고 보도하는데, 이런 삶의 태도가 지금의 성취를 이루게 했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천상 회의를 여시고, 여러 천사에게 욥을 칭찬합니다. 그러자 검사 역할을 맡는 천사 중 하나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며, 만약 주님께서 손을 들어 치시면 그는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판사이신 하나님과 검사인 고발 천사 사이에 내기가 벌어지고, 욥에게 엄청난 시련이 몰려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이 침략하고, 강풍이 몰아닥쳐 순식간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됩니다. 천재지변과 인재가 한꺼번에 닥친 것입니다. 욥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성경은 욥이 죄를 짓지 않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 첫번째 내기에서는 판사이신 하나님이 이깁니다.
그런데 고발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욥의 뼈와 살을 치면 그가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즉 병들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심어 주면 분명히 욥도 고꾸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발자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런데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로 뒤덮인 욥은 잿더미에 앉아, 옹기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으면서도 하나님께 어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데, 70인역 성경에는 더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고집부리며, ‘보시오. 나는 조금 더 버티겠소. 나는 구원의 희망을 기다리고 있소’라고 말할 건가요. 보세요. 당신의 유산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아들들과 딸들, 나의 자궁의 진통과 산고이며 내가 애써 고생하며 키운 아이들이 말입니다. 게다가 당신은요? 당신은 지붕 없는 곳에서 밤을 지내며 벌레 끓는 쓰레기 더미에 앉아 있잖아요. 나는 걸인이자 하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해가 저물길 기다리며, 나를 괴롭히는 고통과 비탄으로부터 놓여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님께 무슨 말이라도 하고 죽으세요.” 욥은 아내의 절규와 탄식에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연이은 고난 속에서도 욥은 현명하게 판단합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며, 복도 하나님으로부터, 재앙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기쁘게 복을 받았다면, 재앙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끝까지 붙들 수 있을까?]
욥기는 초반부터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깊은 지혜를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표현했던 것이 욥에게서는 축복도 하나님으로부터, 재앙도 하나님으로부터라고 고백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만을 알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추한 것이요. 천하 인간들이 좋은 것의 좋음만을 알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좋지 못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하길 바라고, 좋은 것 얻기를 바라고, 기쁜 일만 계속되기를 원하지만, 행복은 불행의 다른 이름이며, 얻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생기고, 기쁨은 슬픔을 동반합니다. 뙤약볕 아래 농부의 땀방울을 식혀 주었던 바람이 바로 모든 농작물을 앗아가는 태풍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양쪽 모두를 보지 못하고 어느 한 편만 붙잡으려 하고, 거기에 집착하다가 더 큰 상실과 괴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현인은 사랑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늘 조심하며(寵辱若驚, 도덕경 13장), 서 있는 자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고, 넘어진 자는 늘 다시 일어설 것을 생각하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신중했던 욥은 극심한 곤경 속에서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제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입니다. 욥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친구들은 처음에 욥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차린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고통 속에 있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절절하고 긴 탄식을 이어갑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아예 그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 중략 ~, 그 밤에는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 중략 ~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3:3-26) 욥이 익히 알고 있는 인생의 지혜가 과연 욥을 계속 지켜 줄 수 있을까요? 욥은 이 고난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인과응보의 논리 반박]
욥의 이런 절규를 듣고 있던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이때부터 매우 길고 지리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욥기 4장부터 31장까지 서로 주고받는 말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욥기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합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면서, 욥이 분명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찾아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한사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강변합니다. 친구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기에 절대로 잘못 판단하실 리가 없고, 따라서 욥의 고난은 분명 죄에 대한 심판이며, 욥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거듭 주장합니다. 그러나 욥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한 탄식에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시는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묻고 싶어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겠다.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 중략 ~ 내게 죄가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10:2-8) 이런 욥의 항변을 들은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엄청난 불경을 저지른다 생각하고, 계속 욥을 다그칩니다. “네 마음을 바르게 먹고,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팔을 들어 회개 기도를 하라!”(11:13-14)
그러나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물고 늘어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 때문에 고통이 찾아온 것이라 말하지만, 욥은 죄 없는 사람에게도 고통과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의 공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욥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과연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무엇인가? 왜 튀르키예에, 인도네시아에, 쓰촨성에 지진이 일어나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가? 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승승장구하고, 왜 못된 놈들이 늙도록 오래오래 사는가?, 그렇게 오래 살면서 하나님도 무시하는데 그들은 평안하고, 자손 대대 부유함을 누리는가? 고아와 과부의 나귀가 끌려가고, 흙에 묻혀 사는 가련한 이들이 학대당하며, 추위를 막아 줄 이불 조각 하나 없는 자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욥은 친구들의 말에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내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31:37-40) 이렇게 욥이 강하게 나오자, 욥의 친구들도 더 이상 욥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엘리후와 하나님의 등장]
이제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후입니다. 엘리후는 젊지만, 욥이 잘못이 없다면서 모든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화가 났고, 또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정죄하기만 하고, 욥의 말에 변변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못마땅해서 자신이 나섭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잘못을 했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 말하지만 엘리후는 욥의 고통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엘리후는 인간의 유한성을 부각하면서 욥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욥을 더 완성된 인간,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엘리후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 ~중략~ 어른께서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른께서는 지금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마는, 이 고통이 어른을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36:15-22)
성경은 엘리후의 말에 대해 욥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엘리후가 말을 마쳤을 때, 곧바로 하나님이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38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온갖 질문이 나열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네가 사자의 먹이를 계속하여 댈 수 있느냐? 매가 높이 솟아올라서 남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 네게서 배운 것이냐?”(38:4-39:26) 하나님의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폭포수 질문에 욥은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40:4-5) 하나님 만나서 따져보겠다고 친구들에게 그렇게 하소연하던 욥이 이상하게 별로 말을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욥을 다그칩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40:7)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약 욥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악한 이들에게 쏟아내고, 못된 놈들의 기백을 꺾어 보고,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고, 그의 얼굴들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인다면 하나님은 욥을 찬미하고 욥의 승리를 인정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하마처럼 생긴 베헤못과 악어처럼 생긴 리워야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짐승 앞에서, 과연 그 어떤 인간이 덤벼들어서 이길 수 있겠는가를 물으시며 말을 마칩니다.
그러자 욥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했다면서 자기주장을 거두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욥기는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가 틀리게 말했고, 욥이 옳게 말했다고 판결합니다. 판결에 따라 욥의 세 친구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여 친구들은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욥은 이전보다 배나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욥기에서 뭘 배웠나?]
사랑하는 여러분! 욥기에서 인생의 어떤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각자가 욥기를 찬찬히 읽으시면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욥기 곳곳에 번뜩이는 지혜 보석들이 있습니다. 캐고 캐도 또 나옵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직접 찾으시길 빕니다.
저는 오늘 제가 깨달은 것 한두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욥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배운 것은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수없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당위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욥의 친구들처럼 인과응보, 불순종과 심판의 논리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삶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도 찾아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넓게 보고 마음도 넓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신 이유는 이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그냥 견디고 있지만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의 전 존재를 다해 이 문제와 씨름합니다. 하나님께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하나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욥은 그냥 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불행이 찾아올 수 있고, 죄 없는 자가 당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딱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하시다면 가만히 계시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해명하셔야 된다고 따져 물어야 합니다.
“다 그럴 이유가 있겠지.”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지니, 고난도 쓸모가 있다.”는 교육적 해석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하나 마나 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대꾸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배움은 실제로 겪으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에게 폭풍처럼 쏟아낸 질문들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시는지요? 어떤 사람은 욥에게 윽박지르는 하나님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 세상을 창조할 때 네가 뭐라도 한 게 있느냐?”라면서 욥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요. 한편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처절한 인식으로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임을 알려 주는 구절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말씀이 다르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같이 이 복잡한 세상을 다스려 보자고 초청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오늘 본문 때문입니다.
“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40:11-14)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저는 욥이 이 말을 듣고서 입을 닫았다고 생각합니다. 탄식과 불평, 질문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나서보겠다는 마음이 욥에게 생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보다 배의 축복을 주시지만 욥은 더 이상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입을 다문 욥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악한 자들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하소연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나 흠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더 아름답게 창조하기 위해 몸소 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조르는 자가 아니라, 직접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난 앞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어린 후배에게도, 그리고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욥은 더 이상 자기 자식이 잘못할까 전전긍긍하며 하나님께 제사나 지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욥은 140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고 성경은 쓰고 있습니다. 저는 욥의 140년 인생이 순탄하였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인가를 더 이상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아니, 어쩌면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욥은 더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투신하며 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강 위에 던져져 있습니다. 때로 어찌할 수 없는 물결이 일렁이고, 거센 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지도 못한 일에 뒤집어 집니다. 때로 파산하여 파편 하나 붙들고 간신히 목숨만 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노를 져야 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너희 인생은 너희의 것이라고, 그러니 힘차게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뜻하지 않은 불행에 패배하지 말고, 그 누구의 엄포에도 굴하지 말고, 하나님께 따져 묻는 그 결기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오늘 욥기는 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여러분의 인생을 저 깊은 강에 실어 불어오는 바람과 대결하며, 흔들리는 물결을 타며 더욱 멋지게, 꿋꿋하게, 그리고 힘차게 살아가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땅의 주춧돌을 놓으시고,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할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을 긋지 못하고,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기백을 꺾으라고 하십니다.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땅에 묻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주셔서 불평과 탄식이 아니라 도전과 승리의 소리를 외치도록 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불러 주시고, 깊은 강 위에 띄우시고 힘껏 노 저어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주님의 큰 은총 아래에서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부활절 셋째주일을 보냅니다. 지난 주일은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였고, 지난 수요일은 4.19 혁명을 되새겼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사회적 약자로 늘 소외당하는 이들을 떠올리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과 고난을 당하는 이들 곁에 주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영생과 평화와 소망과 기쁨으로 넘치길 바라며,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가진 것을 드립니다. 몸과 영혼, 시간과 재능을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예물을 받아 주옵소서. 우리가 물질을 드림으로써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물질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 나아가 선교할 때에 우리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과 기도를 통해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불의한 자들이 잘된다고 시샘하지 맙시다. 불행이 찾아올 때도 겁내지 맙시다. 인생의 깊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끈질기게 살아내고 또 살아냅시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과 거룩한 영의 사귐이 복잡한 삶 속에서도 지혜의 한 줄기 빛을 찾아가는 생명사랑 가족들에게, 어떤 고통 속에서도 파멸되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