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안규식 목사] 물음, 불음, 풀음 – 2023년 2월 12일
본문: 창세기 40장 1-8절 / 욥기 42장 1-6절 / 누가복음 10장 21-24절
우리를 진리 가운데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주일은 주현절 여섯 째 주일이자 우리 교단이 정한 신학교육주일입니다. 교단이 정한 주일에 신학교육주일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사실 우리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생겨난 배경도 신학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후 당시 장로회 총회는 장공 김재준 선생이 가르치는 신학이 성서의 권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1952년 37회 총회에서 일방적으로 목사직을 박탈하고 제명시켰습니다. 이러한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에 항거하여 1953년 38회 호헌총회가 열리고 그 당시 대한기독교장로회 곧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 38회 총회에서 천명한 호헌선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언하였습니다. “1.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건전한 교회를 세움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4.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발전하려는 세계 교회 정신에 철저하려고 한다.”
여러분, 이처럼 신학은 단순한 학문적 활동 그 이상입니다. 신학은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교회를 새롭게 갱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신학은 매우 부담스러운 것처럼 여겨지는 듯합니다. 신학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전유물이지 평신도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듯합니다. 신학은 어려운 것이고 현실적인 삶에서는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사실 신학이란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우리 삶의 근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이야기 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우리 존재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에 관한 말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학을 해야 할까요? 신학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물음, 불음, 풀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신학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물음, 불음, 풀음”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다석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얼 생명으로 주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이 얼 생명을 찾기 위해 하나님과 이 세계에 관해 묻고, 그것을 깊게 생각하여 불리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절로 풀려서 우리 안에 얼 생명이 살아난다고 보셨습니다. 저는 이 물음 – 불음 – 풀음이 신학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 그것을 파고 들어가 불리는 불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풀어지는 풀음인 것입니다. 오늘은 신학의 물음, 불음, 풀음에 대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 신학은 물음입니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신학은 물음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이 신비한 존재인 이유는 그가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란 몰라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질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에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인생이 가야할 참된 길이 있음을 알기에 그 길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에서는 요셉이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 꾸었던 꿈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그 꿈대로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요셉을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던 신학자라 생각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곡식단이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을 향해 절하는 꿈을 꾸고 나서, 그리고 해와 달과 별 열 한 개가 자신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고 나서, 꿈과는 반대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향해 갔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주어야 할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성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치욕스럽게 감옥에 갇히는 등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형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만 가득했을까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복수만 계획했을까요? 물론 이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 고통스런 시간 동안 요셉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에게 주신 꿈을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은 ‘하나의 질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꿈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질문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꿈이 먼저 주어졌기에 그의 불행한 삶은 하나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뜻과 그것에 역행하는 상황에 대해, 용서에 대해, 치유에 대해, 그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을 구하는 신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은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된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보통 그 질문은 고난을 통해 주어집니다. 고난과 구원은 마치 빛과 그림자 같아서 우리는 고난을 알아야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고 가망 없는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 밝히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인간이 고난을 경험합니다. 이 고난은 우리를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자가 바로 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이 던진 고난의 질문을 치열하게 붙들고 씨름하는 자만이 그 땀과 눈물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게 됩니다. 고난의 스승 함석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악의로 포장이 되어 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
요셉은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과 고난을 하나님의 질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꿈을 이루는 성공의 사람이 아니라 꿈을 해석하는 신학자가 됩니다. 요셉은 이전에 형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꿈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꿈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신학자가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빵을 굽는 시종장과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이 꾸었던 근심어린 꿈을 듣고 오늘 본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삶의 의미나 고난과 같은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이를테면 기후변화와 같은 생태위기, 튀르키예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폭력과 갈등,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 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그분의 질문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질문에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질문이지만, 그 답은 하나님의 질문을 붙잡고 씨름하는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 신학은 불음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신학은 불음입니다. 다석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묻고, 그 물음을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불음이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딱딱한 것도 입에 물고 있으며 그것이 불리고 나중에는 풀리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물음은 불려야 합니다. 불리는 것은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신학에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을 불리는 불음의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치 어떤 것을 품고 끊임없이 불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이 불음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불음의 과정이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변화의 과정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귀중한 깨달음 전에는 반드시 깨어짐의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커다란 지적 성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신학하는 사람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가 바로 깨어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학문 곧 공부라고 말하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의 문제입니다. 공부는 사람의 일입니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이 맞습니다.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공부를 위한 체력 때문에 엉덩이가 중요하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자신의 몸으로 구체화 되는 삶으로 증명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공부를 하려면 정직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파고 들어야 합니다. 생각이 숙성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학문 곧 신학은 신학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깨어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욥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욥은 흠잡을 곳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선하며 남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하나님의 축복의 법칙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지혜와 선함, 신앙과 인격은 그가 왜 7000 마리의 양, 3000 마리의 낙타, 각각 500 쌍의 소와 암나귀를 가진 동방의 으뜸가는 부자인지를 설명하는 명확한 이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한 순간 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축들과 종들을 도적들과 천재지변으로 빼앗기더니, 급기야 자녀들까지 모두 잃습니다. 결국 자신에게도 온 몸에 악성 종기가 생겨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이 때, 욥의 친구들 곧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옵니다. 나중에는 엘리후가 와서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다가 나중에는 욥과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욥의 불행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뭔가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이 찾아온 것이라 주장했고, 욥은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이 치열한 논쟁은 오히려 욥을 더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 불교에서 선문답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엉뚱하게 질문만 하십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누가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의 근원에 들어가 보았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욥기를 끝까지 읽어도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욥기의 결론은 욥의 의미심장한 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고난, 친구들과의 뼈아픈 논쟁, 그리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통해 욥은 변화합니다. 그 변화는 자신의 깨어짐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듣던 대로 알았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이전까지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세상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인격까지 바뀌어,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욥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가진 견고한 틀이 깨어져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깨어짐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만남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이러한 깨어짐을 주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가진 편견, 오만, 몸에 밴 습성과 죄성 등 우리의 한계에 갇혀 거기에 편안히 머무르기에 이전의 욥처럼 하나님을 귀로만 듣게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틀 안에서 안전해 하고 머무르려 합니다. 하지만 참된 신학은 이 모든 것을 깨뜨립니다. 그런데 깨지기 위해서는 불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향한 물음을 가지고 깊이 파고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깨어짐은 우리를 더 넓은 지평과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신학은 불음이고 깨어짐입니다.
- 신학은 풀음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신학은 풀음입니다. 신학의 물음, 불음, 풀음 중에서 마지막은 풀음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풀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의 마지막인 풀음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곧 예배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신학의 끝은 깨달음이나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신학의 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입니다. 신학과 종교학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문을 낳지 못하는 신앙은 미신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를 찾는 일은 그것이 학문을 낳는 데 있다. 하느님 아버지를 깨달은 이는 연구에 연구를 계속하여 학문이 그대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신학의 마지막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기도 곧 예배로 마무리 짓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의 시작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인식되도록 내어주실 때뿐이다.” 여러분, 신학의 시작과 끝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신학의 시작과 끝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이런 예가 누가복음에서 나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선교를 위해 파송했던 제자들이 하는 보고를 듣습니다. 이들은 각 마을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의 선교 보고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감사와 찬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파송한 제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을 두고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두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끊임없이 초월하시는 그분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혜 있는 사람들과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졌고, 오히려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드러납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나그네 길을 함께 걷는 동료들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예배하고, 영원히 그분께 내어맡길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마지막은 이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 우리가 함께 이곳에 모여 있는 것, 내가 걷는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 이 세계의 운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 때 우리는 예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발견하려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마지막은 풀음 곧 예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노력 끝에 하나님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천지 자연이 모두 하느님이 보재주신 글월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신학은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는 그 질문을 붙들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신학은 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뜨립니다. 그리고 변화시키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학은 풀음입니다. 신학의 처음과 끝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도무지 우리의 지혜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신학의 마지막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렇게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찾도록 하나님은 그분의 편지를 곳곳에 남기셨습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란 무한한 허공에 무수한 별들이 가득 차 있다. 이 천지 자연이 모두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글월이다.” 주님께서 신학자로 부르신 성도 여러분, 그분이 보내신 편지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물음, 불음, 풀음의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학자가 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부르시고, 함께하시며, 예배하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온 우주에 새겨진 하나님의 편지를 읽게 하시고, 묻고, 불고, 풀도록 우리에게 선하신 은총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더 만나기 원합니다. 더 찬양하기 원합니다. 이로써 세상에 아버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추게 하시고, 그 빛으로 모든 만물이 주 앞에서 밝히 드러나 생명을 찾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