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목사] 여럿이 하나 되어 – 2023년 1월 15일 여신도회주일
고린도전서 11장 27-31a
[여신도회 주일]
우리는 1937년 교단총회에서 제정된 이후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신도회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 날을 지정하여 지킨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역할]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회와 신도의 수가 점점 줄고, 이 사회에 큰 의미를 줄 수 없어 보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비난하고 교인마저 교회를 떠나버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까요?
조선 후기 신분에 귀천이 있고, 곳곳에 있는 차별이 차별이라고 조차 여기지 않았던 때,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비주류로 살아가던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준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큰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여신도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해내고 있습니다. 자립된 공동체로 여성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기도와 후원으로 열심히 섬기며 활동한 이 공동체는 한국교회의 일부이자 지금의 한국교회를 있게 만든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여성 장로를 허락해 달라며 총회에 헌의를 하며 점점 시대에 맞게 새 일꾼을 만들어 온 역사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여성의 권리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더 다양한 가치를 보고, 다양함을 품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몸의 비유 –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사람의 몸에 비유하며 우리가 하나임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몸을 비유로 삼아 무언가를 설명하는 방법은 고대나 지금이나 익숙합니다. 다양함을 설명할 때 한 눈에 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기 때문이지요. 몸과 도시국가 사이의 유비는 고대에 널리 사용이 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평민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해석을 위해 규칙적으로 참고되는 ‘메네니우스 아그립바’의 비유는 ‘파업’의 행위를 몸에 비유해 이렇게 말합니다.
‘몸의 지체들이 배에 밥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면 몸이 쇠약해지고 죽음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만약 지체들이 위장을 위해서 일했다면, 전체적으로 유익했을 것이다.’
이 비유는 평민들이 ‘반란‘을 멈추도록 설득하기 위해 사용했던 비유입니다. 만약 농부들, 군사들, 상인들, 수공업자들이 원로원에 대항하여 그들의 일을 거절한다면, 필연적으로 공동체는 철저한 손실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고, 곧, 며칠 이내에 몸 전체가 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몸의 비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체들의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고대의 어떤 저자도 이를 위해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여럿인 우리도 한 몸”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앞서 주의 만찬/우상숭배에 바쳐진 제물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어 먹고, 그 떡이 하나이기에 우리도 한 몸임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결국 하나 됨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의 몸’은 그리스도의 육체 속에 참여하는 신자의 무리, ‘우리’가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12:13). 그런데 “그리스도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는 결론을 맺습니다. 많은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원리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많은 지체가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데, 이 몸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비유가 나오면 한 공동체를 떠올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우리를 생각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실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으로, 한 몸인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이나 고린도 시민이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토대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일부라는 주장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나를 강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데 빗나가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모든 말과 지식에 있어 풍성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 풍성한 성령의 선물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더 견고해졌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향한 그들의 기다림은 그만큼 더 간절해졌다고(1:5-7)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처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풍부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사용하지 못하는 교인들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조건 없이 주어진 은사를 과시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는 받은 은사와 그 은사를 주는 성령에 대한 몰이해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신자들의 모임을 자기 과시의 자리로 변질시켰고, 받은 은사가 누군가를 돕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과시욕과 지배욕이 서로 부딪혔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벌어지는 무분별한 열정과 말이 갈등을 일으키고, 선교를 위한 사업이 결과만을 두고 경쟁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행하는 일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잘남을 드러내고,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과시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12장 13절에 나오듯이 우리 스스로가 한 성령을 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모두가 마시도록하였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부분이 전부라는 착각]
바울이 열심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설명하고, 이어지는 다음 논지는 서로의 다양함을 매우 상세히 풀어냅니다. 공동체를 강조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구성원들을 억압하게 됩니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의견이 묵살되고, 주장이 강한 사람들의 말만을 따라갑니다. 하나가 돼야 한다는 강조는 구성원 모두가 한결같아야 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한 몸에 다양한 부위가 공존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의 몸이 각 부위의 다양함을 버텨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몸이 제대로 된 몸으로 기능하려면 서로 다른 부위들이 적합하게 자기 나름의 모습을 드러내야합니다.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큰 하나는 획일화된 여럿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다양한 여럿이 모여함을 말합니다. 한 몸의 유대를 망치는 것은 종종 각 지체의 다양함을 부정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상대의 다름을 부정하고 옳다고 합의된 하나의 모습으로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너무 옳아서 몸에는 다양한 부분이 존재함을 잊고, 내 기준에 맞게 다른 이들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래야 이 공동체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공동체를 존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몸의 비유를 통해 다양함을 부정하는 게 아주 터무니없음을 지적합니다(15절 이하).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고 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모순이지요. 아무리 나를 차별화하고 싶어도 하나의 몸에 속해있는 현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온 몸이 각 지체의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 몸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남다름을 내세우는 것은 내 기준에 맞게 모두가 동일해야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가면서 매일 경험하듯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신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름의 인정이 더 성숙한 하나를 만든다]
바울은 다양함이 서로 도움을 통해 하나의 몸으로 어우러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기에 역할만을 보았을 때는 자신에게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몸의 일부는 본능적으로 서로 돕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 다양한 존재가 있음은 이 공동체가 더 성숙하고, 많이 이를 품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어른만이 존재하는 교회는 기준이 다 어른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아이들이 왔을 때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물건이 필요하지도,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지속 되면 그 교회는 어른만이 올 수 있는 교회로 굳어갑니다. 우리 교회에 신체가 불편한 사람이 있고, 또는 그 존재를 인식한다면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거나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거나 할 때, 우리는 이 존재가 없으면 전혀 생각하지 못할 부분을 고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턱을 없앤 다거나 휠체어를 타고도 건물 곳곳을 다닐 수 있게 설계를 하겠죠. 이렇듯 다름의 인정과 경험은 더 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경험이 곧 나의 경험이 되고, 그 사람의 필요가 곧 이 공동체의 필요가 됩니다. 그래서 나의 이해 폭이 넓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더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 내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의 요청을 듣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우리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지만 약자들과 고난받는 자들의 요청을 듣고 연대하는 것은 우리를 더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며 나의 생각과 품을 더 넓혀줄 것입니다.
바울은 12장 전체에 걸쳐서 몸 이야기를 이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각 그 몸의 부위(지체)들입니다(27절). 우리 몸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의 다름을 분쟁의 핑계로 삼지 말고 서로를 위해 살고, 각자의 기능에 충실하며 건강한 몸을 회복하라는 권고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 안에 일꾼들(신체 부위)을 세웠는데,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쭉쭉 나열하며 마지막에 방언을 말하는 자를 언급합니다. 아마 현재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고려한 듯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29~30절에 물음을 제기합니다. ‘모두가’ ~ (사도, 예언자, 교사…) 이겠습니까? 라는 이 물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니요!’라는 대답을 유도합니다. 이 물음은 여러 은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다양하게 주어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바울은 모두가 다 같은 은사를 공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사도인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다른 사람이 사도가 아닌 것도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합니다. 바울이 당연한 소리를 이리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해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가 어려워서 입니다.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잘 하지 않듯, 내가 잘하는 것을 남이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못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다를 뿐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이 있듯 저 사람도 못하는 것이 있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하는 것을 찾아주고, 연대하며 각자가 잘 살아내며 더 성숙한 생명사랑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함께지만 홀로, 홀로지만 함께]
오늘 본문은 다양성 안에서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신체 부위는 느슨한 연맹체가 아니라 아주 복잡하게 얽힌 ‘하나’의 몸으로 세상에 나섭니다. 그러면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잘 해내는 것 역시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는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 연합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 못하는 것을 싹 가져가서 해결해줘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당장에 보기에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할 역할마저 빼앗아 가서 몸의 일부를 퇴화시켜 버립니다. 제가 대학원 수업시간에 북한산 백운대를 향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발을 아주 크게 다친 적이 있습니다. 인대가 완전히 끊어져서 수술까지 했습니다. 저는 당장 한쪽 발을 쓸 수가 없었고, 제가 밖을 나가기 위해 두 팔과 목발, 한 다리를 의지해야 했고, 모든 감각을 이용해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했습니다.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잘 돌아다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친 다리의 재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죠. 다시 이 다리가 회복을 하고 잘 걸을 수 있게 운동을 해야합니다. 그때까지 다른 부분들이 평소보다 더 노력을 하는 거죠.
약한 부분을 보호하고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는 방식 입니다(24절). 하나님은 약한 신체 부위에 더 큰 명예를 부여하여 몸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하셨고, 몸에 아무런 분쟁이 없이 몸의 기관들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한 신체 부위가 고통스러우면 모든 부위가 함께 고통스럽고, 한 부위가 영예를 얻으면 모든 부위가 기뻐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보호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그 신체 부위가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음은 누군가가 힘들 때 기대고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회복하기를 기다려주고 지금의 현실에 낙담하지 않게 위로를 주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무분별한 도움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일으키지 못하고, 스스로 살아낼 힘을 길러주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역할을 그 사람의 고유함을 회복시켜 주고 더 잘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서 이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연단하고 성장하기도 해야 하고, 나의 고유성과 함께 공동체와 연대하기도 해야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그 일부가 돼야합니다. 함께 살아가지만 스스로의 힘도 기르고, 각각의 고유함을 더 아름답게 만들면서 훈련된 하나의 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신명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장 큰 은사를 추구하라_사랑을 향한 길]
마지막으로 1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더 큰 은사들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은 13장에 쭉 나오는 사랑에 기초한 길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추구하는 것은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어 참된 은사가 되게 하는 최고의 가치, 곧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초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것들을 충실히 잘 해나가야 합니다. 사랑에 기초하여 서로의 다양함을 품고 살아가야합니다. 우리가 곧 그리스도의 몸임을 잊지 않아야합니다. 그것을 향하여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다 같은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다 다르게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시려 우리를 이렇게도 다른 존재로 지어주셨음을 우리가 기억하게 하여 주십시오. 누군가와 비교하여 나의 잘남을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영광을 받으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의 품을 더 넓혀 주시어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존재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몸과 마음의 훈련을 통해 이 공동체가 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