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김학로 장로] 공의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 – 2022년 9월 18일

사무엘상 30장 21-25절, 시편 82편 3-4절, 마태복음서 20장 1-15절

오늘은 우리 교단이 지정한 남신도주일입니다. 한문덕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이시기도 하지만,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지향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평신도 신앙훈련을 위하여 평신도 설교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렇게 단에 서게 되었습니다만 실력도 없는 사람이 설교를 하는 것이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더구나 전국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하시는 교우님들이 보고 계시기에 더더욱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끝 주일에 우리는 딱따구리 청소년 수련원에 가서 창립10주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두 해가 넘도록 식탁 교제를 가질 수 없었는데, 이날 모두 함께 푸짐한 애찬을 나누고, 재미있는 레크레이션과 보물 찾기, 사진 전시회와 기념식 등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10년 전 우리 공동체가 방황하던 때, 위로해주시고 방향을 잡아주셨던 강영선 목사님의 격려의 말씀과 우리들의 신앙의 기초를 잡아주셨던 문대골 원로목사님의 축하의 말씀은 참으로 은혜로웠고, 가르침을 받던 그 시절의 감동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 나름의 신앙고백문을 채택하여 한 목소리로 다짐하고, 한문덕 담임목사님께서 새로운 10년의 목회구상을 발표해 주신 것은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모으고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다시 한 번 재도약하는 계기로 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은혜의 10년을 보내고 난 지금, 앞으로 우리 공동체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다시 높이 솟아오르려면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10 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위해 가장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역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첫 선포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막 1:14~15),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가장 주된 사역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음을 강조합니다(마4:23).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와서 하늘에서 이룬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마 6:9~10) 하나님께서 하늘과 이 땅을 직접 다스리신다는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공관복음서에 104번이나 사용되는데, 거의 모두 예수님 자신의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먼 훗날 세상의 종말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유대교의 지도자격인 바리새파가 언제 하나님 나라가 임할 지를 예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또는 ‘저기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17:20~21)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율법학자들보다 더 올바른 삶을 살고(마 5:20),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는(마7:21)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때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 박해도 받겠지만(마5:10),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 군사적인 힘을 가진 자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진 자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마 5:2),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며(마 18:3, 19:14, 막 10:14, 눅 18:17), 하늘의 영으로 거듭나서(요3:5),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마6:33) 성령을 찾고 하늘 문을 두드리는 자의 것입니다(눅 11:10-13).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왕권이 주도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공동체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교회에게 하늘의 열쇠를 주셔서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16:15-19).

“교회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지만 교회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곧 교회의 사명이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 확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없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는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증표로,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그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며 주님의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지난 6월 대우조선 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행했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수년전 불황에 빠져 도산 위기에 있을 때, 하청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임금을 30%나 깎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자발적 희생과 정부의 대규모 지원으로 대우조선해양은 선박수주 세게1위를 탈환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은 회사가 어려울 때 삭감한 그대로였고, 8년째 답보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다시 잘 되었으니 임금을 원상복귀 해달라는 것입니다.

도색경력 23년차로 대우조선해양에서만 19년 일한 노동자의 임금은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입니다. 정년 퇴직을 1년 앞둔 63년생 노동자의 2022년 1월 급여명세서를 보면 이들의 월 실질 급여는 233만 9천원에 머뭅니다. 한달 중 27일, 총 291시간 일하는데 최저 임금 9,160원에 딱 맞춰서 주는 것입니다. 상여금도 없고, 수당도 없습니다. 회사가 불황에 빠지기 전 이들은 월 300만원이 넘는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발적 임금 삭감을 했고, 회사는 그 덕에 다시 살아났는데 하청 노동자들은 계속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파업에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의 두 배를 받는 정규직 조합원들은 파업 반대 투쟁을 벌였습니다. 회사가 책임져야 하지만 오히려 원청과 하청 사이의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불법 파업에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면서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경 진압할 태새였고, 오갈 데 없는 하청노동자들은 주눅이 들어 결국 51일만에 겨우 4.5% 임금인상을 합의하고 파업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파업 기간 동안 회사측이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470억이나 되는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습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당해왔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까요?

<정의와 공의>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바랍니다. 누구하나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더욱 공정한 세상이 되어야 모두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세분화해서 말합니다. 그는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합니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가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정성(fairness)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배분적 정의를 통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공정성이란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 곧 출신 성분이나 소유재산, 개인의 역량 등의 차이, 즉 불평등을 전제한 것입니다. 신분이 높으면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정의란 결국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정의는 안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며 규범과 제재를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이런 정의는 응보적 정의, 곧 사회 안전과 통합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성경은 이와 다른 정의를 말합니다. 처벌과 응징이 아닌‘회복적 정의’에 관심합니다. 강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품는 것, 누구나 지닌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의 비유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자비와 사랑에 근거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이 나중에 와서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아가는 사람을 보고 자기는 좀 더 받으려니 하다가 자기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주인에게 항의하지요.

그러나 주인은 자신이 선하다고 말하면서 원래 약속한 한 데나리온이나 받아서 가라고 말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관심은 자신이 고용한 모든 품꾼들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에 있습니다. 일한 양으로 따질 경우, 1시간 일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아침 6시에 온 이에게는 12데나리온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정의요, 공정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포도원은 결국 파산하고 모두 일자리를 잃으며 결국 더 나쁜 결과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에 주목합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오늘도 공쳤다는 허탈함과 좌절감을 안고 근심하며,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품꾼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어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의 공의라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지난해에 우리사회에서‘코비드-19’의 대유행으로 어려워진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일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습니다.‘국민 모두에게 지급해야 한다, 아니다,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라는 다툼이었지요. 왜‘일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느냐, 국민 모두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흥분하면서, ‘빨갱이 정부라 그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긴급재난구호가 왜 색깔과 관계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노동 강도와 노동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똑같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한다면, 마태의 이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이고, 하나님은 빨갱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질문으로 끝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으나, 헬라어 원문은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악하오?’랍니다. 이 질문은 포도원 주인의 질문이자, 동시에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남긴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못마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이지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들의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경쟁과 차별의 구조 위에 세워진 경제 질서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을,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것인지, 자기 자신의 ‘악한 눈’으로 볼 것인지를 청중들에게 선택하라고 하신 것이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다윗>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추격하는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땅 가드로 망명하여 아기스 왕의 용병이 되었으나 우여곡절을 겪고 부하들과 함께 다시 자신의 근거지 시글락 성으로 되돌아 오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말렉 족속이 이곳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성안에 있는 여자들과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모두 끌고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목 놓아 울었습니다. 다윗의 아내들도 잡혀 갔습니다. 부하들이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큰 곤경에 처한 다윗이 주님께 여쭙니다. “제가 이 강도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틀림없이 따라잡고 틀림없이 되찾을 것이니 추격하라.”다윗이 부하 육백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습니다. 추격하는 도중에 낙오자가 생겨서 브올 시내에 머물렀습니다. 시내를 건널 수 없을 만큼 지쳐있는 사람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만을 거느리고 계속 추격하여 아말렉 진지에 이릅니다. 매복해 있다가 새벽에 기습 작전을 펼치고 다음 날 저녁까지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둡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아말렉에게 약탈당한 모든 것을 되찾았고 두 아내도 되찾았습니다. 다윗의 부하들도 잃어버린 것을 모두 찾았습니다. 돌아오다가 전에 다윗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병든 자들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남아있던 낙오자들 200명이 나와서 다윗을 환영하고, 함께한 군인들도 환영합니다. 다윗도 그들에게 나아가 따뜻하게 문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함께 출전하였던 군인들 가운데 몇몇은 거기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못마땅하여, 자기들과 함께 출전하지 않았던 군인들에게는 되찾은 물건을 하나도 돌려주지 말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가게 하자고 우겼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들을 달랬습니다. “동지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쳐들어온 습격자들을 우리의 손에 넘겨주셨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하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하오.”

다윗이 이때에 정한 것이 율례와 규례가 되어,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 지킨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임금이요,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마인드를 갖춘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그에 따른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적 대타협이란 시편의 증언처럼,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 주는 데에서 가능합니다(시 82:3).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이사야 42:3).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받았다(빌1,29)고 말합니다. 교회는 믿는 특권은 누리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동일시하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고난 받는 특권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사회적 대타협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누려온 믿음의 특권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특권을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궁극적 사명>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으며, 악과의 무서운 싸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는 이러한 투쟁을 감당하는 기구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됐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사단의 지배 아래 있게 됐습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하고, 그 지은 죄의 결과로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줬습니다(롬 6:23).

결국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인간이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나 창조자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는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죄인들을 불러내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막 2:17).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을 왕으로 섬기는 삶의 방식, 곧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삶의 모습을 회개하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생이 가진 궁핍함에서 창조주의 부요함으로 들어가며, 인생의 유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통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항상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시고 항상 행동하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결국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나들목 교회 김형국 목사님은 “교회는 단지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수용하고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고(마 5:14~16, 엡 5:8~9, 빌 2:15, 골 1:12, 살전 5:5), 우리 가운데 있는 소망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벧전 3:15)”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온전한 회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섬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답게 하기 위해 교회에 소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며, 그 분을 닮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머나먼 미래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공동체 가운데 임하여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들어내게 하옵소서.

때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악의 세력들에게는 분연히 맞서 싸워서 물리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철저히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