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정한얼 성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 2022년 7월 24일
로마서 12장 17절
평온한 평신도의 삶을 잘 살고 있던 올해 초에 한문덕 목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서울에 살고 있지 않아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전화심방으로 안부도 물어주시기에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저에게, 본인의 안식년 기간 중에 설교를 한 번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생명사랑교회에서는 평신도 설교도 하고 있고, 다양한 성도님들이 계시지만, 저처럼 전도사의 생활도 해보고, 다시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평신도로서 신앙생활 하면서 느낀 점들이나 다양한 것들을 나눠주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일정도 한참 뒤인 7월 중이라고 하셔서 그 당시에는 별다른 부담없이 알겠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도사 시절에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은 몹시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겨우 20분 정도의 글을 쓰는데, 짧게는 4-5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이 걸리기도 합니다. 또한 매번 이 자리에 서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저는 그 힘들었던 기억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목사님과 통화할 당시의 그 짧은 저의 생각과 판단이, 이번 한 주 동안 저를 무척이나 머리 아프고 힘들게 몰아붙였습니다. 7월 초에 다시금 강미희 전도사님께서 설교 일정에 관해서 알려주실 때까지만 해도 사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2주 전 생각지 못했던 집안일들과 여러가지 사건사고들이 생기면서 개인적으로 일정이 많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번 주가 시작되었는데, 회사에 복귀해서 보니까 쌓여있는 업무들과 함께 ‘내가 설교 준비를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전도사 시절에는 매주 1편에서 2편 정도의 설교를 썼으니까 당연히 조금 집중하면 금방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저는 요즘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의 신분이고, 낮에는 회사에서 업무를 하고 저녁에 와서 책을 읽고 설교준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도사 시절, 다들 사회생활 하시면서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예배에 오시던 성도님들의 고충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더라구요. 이 부분을 우리 교회 교역자님들이 물론 잘 아시겠지만, 조금 더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설교문을 쓰려고 했더니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함께 예배를 드리는 분들과 나눠야 할 것인가? 생각의 결론 끝에 목사님께서 전화주셨을 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성서 본문 해석에 집중하는 설교보다는 평신도로서 느끼는 점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사실 성서 본문을 통해 좋은 말씀을 전해주시는 것은, 지난 주 설교처럼 육성한 부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너무 잘 해주시기 때문에 굳이 제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찾아온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게 좋을까? 였습니다. 제가 교육 전도사 시절, 저는 유년부 담당이었는데요.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교육 전도사들도 1년에 한 번은 오후 장년 예배 설교를 맡아서 하는 것이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옛날 자료들을 찾아보니, 첫 장년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교의 제목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처음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첫 설교 제목을 그렇게 지었던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저랑 처음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상대와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왜 그렇게 살아야할까? 이런 내용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살아내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든 생각은, 왜 하필 많은 주제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나누고 싶었을까? 입니다. 생각이 참 많죠..?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져 있고, 여전히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제가 생각했을 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틀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은 굳이 언론에서 조사한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장 아시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제 주변만 살펴봐도 너무나 잘 보이는 현상들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계십니다. 같은 기장 교단이구요. 저희 집은 항상 교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저에게 목사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힘이 없는 직업이었고,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은 장로님, 권사님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장로님, 권사님들이 그렇지 않고 좋은 분들도 많다는 것은, 우리 교회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니 부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일들로 인해 제가 청소년 시절부터는 교회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삐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결국 똑같거나 오히려 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저만의 신앙도 생기고, 신학도 공부하고 하면서 그런 삐딱한 시선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사역을 하면서 다시 느꼈던 점은, 그래도 여전히 교회 안을 살펴봤을 때, 남들의 눈에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시고 잘 섬기시는 분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시선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시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제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친구가 그래도 전도사였고 이러는데 교회에 나가볼 생각해 본적 없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전에도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던지긴 했었지만, 사실 이렇게 진지하게 물어본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 중 한 명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교회 다니면 뭐가 좋냐.. 어차피 다니던 안 다니던 사는거 다 똑같더라..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사람 못 봤다..” 이런 부분을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제 고등학교 친구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부끄러웠습니다.
이러다보니 항상 제 삶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고, 나아가 나는 얼마나 잘 살아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작을 때에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이타적인 마음들보다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우선일 때가 많습니다. 저의 30개월 된 조카를 보면 모든 세상은 조카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아이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아주는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래서 저 역시도 처음으로 저의 신앙을 갖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신앙이 성숙하지 못할 때에는 여전히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교회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조차도 나에게 맞춰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갈수록 같이 살아가는 이웃들, 타인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부분이 저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나만을 위한 하나님을 생각하던 그 작은 신앙에서 이제는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향할 수 있는 것,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몰라서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니까요. 문제는 이런 사실들, 말씀들을 다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무엇이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저는 “값싼 복음”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정말 쉽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하지만 저는 이 간결한 명제가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숙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믿는다고 내가 고백한 순간,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다니시는 분들은, 그저 남은 인생동안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한 주간 지었던 죄들 용서해달라고 회개하고,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가끔 시간나면 봉사하고, 그러다 죽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믿었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런 교리적인 믿음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리 신앙의 여정은, 입으로 믿음을 고백한 순간에 멈춰있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 교회의 송구영신예배 때 본문이었던 로마서 12장 1절에서 21절 말씀 중 한 구절입니다. 떼제기도회 형식으로 드려진 예배에서, 함께 읽은 말씀 중 특별히 내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을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이 구절이 유독 와 닿았습니다.
특별히 9절부터 모든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먼저, 이 구절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적 전통에 전해 내려오던 것과 상반되는 내용, 즉 사회적 통념과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이런 비슷한 내용이, 불교의 가르침에도 있는데, “좋은 보응을 위해 악을 자비로 갚으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교의 가르침과 바울 사도의 말씀과의 차이점은 바로 ‘좋은 보응’이라는 세상적인 대가를 추구하는가?에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좋은 보응을 위해서 악을 자비로 갚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로서 당연히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야 한다고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내 가족, 나랑 친한 사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잘 보여야하는 사람들에게만 좋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수가 편하고, 다수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권력을 갖게 되고, 반대로 없는 사람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마주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소수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위태로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서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투쟁했던 사람들, 위험한 상황에서 계속된 투쟁을 하다가 지난 22일에 극적으로 타협된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사람들 등등. 사실 이들이 엄청난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세상 사람들은 굳이 왜 그런 위험한 방법을 택하냐고 오히려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탓합니다. 하지만 소수인 사람들이 그런 방법들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수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소통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세상과는 다른 시선으로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즉 다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매 주일 모여서, 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 가운데에 나눠진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한 주간 또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갑시다”라고 다짐하면서 교회를 나섭니다. 하지만 저부터도 가끔은 그 다짐이 수요일, 아니 화요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의 풍파 속에 휩쓸리며, 머릿속은 온통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라는 생각들로 가득 차 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지!” 라고 했던 다짐은 사라져버리고, 하루하루의 생을 겨우 살아가는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이 나눈 말씀의 제목을 고민고민 하다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문법적인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의도한 느낌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동적으로 살아가지는 못할지라도 버티면서 살아내보자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낸다는 것은 다르게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 이전의 삶과 비교해서 갑자기 엄청나게 바뀌거나 다르게 사는 것처럼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사람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바뀌면 위험합니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 선택의 순간들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예를 들어 10번의 기회가 있을 때, 그 중에서 몇 번이나 그런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횟수를 조금이나마 늘려나가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나 혼자서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 옆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 그 가운데에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운동선수라고 할지라도 기본기는 매일 연습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 마지막 순간에, 화려한 기술이 아닌 기본기가 진짜 그 사람의 실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조금 더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피곤하고 힘들 때에도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는 모든 사람이 선하게 생각하는 일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의 기본기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 교회 교역자님들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주시는 자료들을 토대로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계속 살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들이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금씩 옮겨갈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녹아들면,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매일매일 세상적으로 조금 더 편하게,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선택의 길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불편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으로만 다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한 주를,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저희를 항상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오늘 부족하지만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입으로만 고백하고 멈춰있는 신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으로 살아내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동역자들과 함께 느리더라도 꾸준히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 것에서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사랑 교우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길을 먼저 걸으시고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