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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실 전도사] 우리는 주님만을 따릅니다 – 2022년 5월 29일

사무엘기하 1장 1-16절, 사도행전 16장 6-15절

  점점 짙어지는 녹음에 계절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낮에 열기와 밤낮으로 서늘한 기운은 하루를 살아나가는 모두에게 삶의 열정과 함께 쉼과 위로, 평안을 주고 있습니다. 함께 예배에 참여하여 신앙을 나누는 이 시간, 신앙의 열정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가득하길 빕니다. 녹음의 계절 건강한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처럼 우리 모두의 신앙도 더욱 푸르고 풍성해지길 소망합니다.

  시골에서 자라 산과 들, 논과 밭을 뛰어다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보리가 자기 키보다 높게 자란 곳을 보며, 정글이라며 수확을 앞둔 보리밭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남의 집 보리농사를 망쳤습니다. 보리밭 주인은 아이의 부모를 쫓아와서 교회다니는 아이가, 못된 짓을 했다며 화를 내며 보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망친 보리밭의 규모보다 더 큰 보상을 해야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혼내기보다는 주변의 시선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말썽꾸러기에 “교회다니는 애가 왜 저래?”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교회 다닌다는 애가 왜 저래?”

  위에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주변에서 교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런 말들을 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동네에서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 배려있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교회를 다닐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교회에 다니는구나, 교회에 다녀서.”라는 표현들을 자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일반화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말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위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아이에게 붙는 수식어같이 “교회다녀서.”, “교회다닌다.”는 말이 붙곤 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말썽꾸러기나 동네를 소란하게 하는 아이에게는 “교회 다니는 애가 왜 저러니.” “교회 다니는 애가 그러면 안돼.”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그 시절, 교회를 다니는 이들에 대한 주변의 시선과 인식은 긍정적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애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도덕적인 수준이 요구되었고 그 판단에서 벗어났을 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시선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역시 더 조심하고 주변에서 질타가 이어지지 않도록 집안 단속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나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있어 주변의 시선은 차갑습니다.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1984-2021년 종교현황” 보고서의 호감종교 항목에 따르면 2021년도 3대 종교 중 개신교는 6%로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10년 주기로 이루어지는 조사가 이번 코로나 19라는 특수상황을 인식하고 기록하기 위해 작성되었고 이 보고서를 통해 현재 개신교를 향한 시선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종교인 82%가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반면 개신교인 80%는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준다고 답변하였습니다. 개신교인들과 비종교인들 사이에 아주 큰 간격이 존재합니다.

  우리사회는 엔데믹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거리는 활기를 되찾아가고 다시 일상으로의 회복과 복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시선, 인식은 여전합니다. 차갑습니다. 우리를 향했던 긍정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이 그리울 때입니다. 우리들도 회복을 위한 걸음을 시작할 때입니다. 말씀을 나눌 때, 함께 그 지혜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사무엘하는 사울의 죽음과 한 젊은이의 등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다윗에게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소식을 전합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패전이었고, 그 전쟁에서 사울과 요나단 역시도 전사했음을 이야기합니다. 다윗에게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첫 보고입니다. 이 젊은이는 아말렉 사람으로 사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사울의 죽음을 도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다윗 앞에 내놓았습니다. 왕의 물건이 등장함으로써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다윗이 확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전한 소식이 조금 이상합니다. 사무엘상 31장에서 다룬 사울의 죽음과 이 젊은이가 전하는 소식이 다릅니다. 31장의 기록에 사울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자신을 모욕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사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아말렉 젊은이는 사무엘하 1장 13절에서 자신을 외국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게르”는 단순히 스쳐가는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에서 거주하는 거주민으로서 어느 정도 권리를 가지고 살았던 외국인임을 의미합니다. 거류민으로서 이 사람은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획득 루트가 무엇이든 그는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얻게 되었고 다윗과 사울에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름의 시나리오도 작성하여서 다윗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서 적군 수장의 물품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큰 공적이 됩니다. 이 아말렉 젊은이가 사울 왕의 물건을 다윗 앞에 내놓음으로 자신이 사울을 죽인 공적을 인정해줄 것과 다음 왕인 당신이 나에게 적절한 보상을 내리리라는 기대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향해 “내 주”라고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서 다음 왕을 다윗으로 확신하고 있음 또한 봅니다. 애도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행동에는 다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면, 적당한 보상과 공적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았을 아말렉 젊은이. 그런데 그의 눈앞에서 일어난 모습은 그를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보고를 받은 다윗이 애도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보상을 받고 행복했어야 할 그의 해피엔딩 시나리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한 죄를 물어 이 아말렉 젊은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적대하는 현직 왕과 차기 1순위 후계자의 죽음, 그들의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왕의 물건들. 다윗 앞에 그가 왕위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들이 나열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이해로는 아말렉 젊은이의 시나리오대로 그는 보상을 받고 삶을 보장받았을 것이고, 다윗도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며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눈앞에 나열된 조건들을 보면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애도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장의 다윗의 반응에 대한 견해들은 차이가 있지만 다윗이 이 일을 개인적 이해로 해결하지 않았음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 그 뜻과 가치를 따르는 자로서 움직였습니다. 차기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기준과 원칙, 가치관을 확립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기준과 원칙, 가치관 앞에서 세속적 가치를 따랐던 계획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아말렉 젊은이처럼 눈 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기 위해 어느 정도 거짓과 불의에 대하여 타협하고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사도행전 16장 6-16절은 소아시아지역에서의 바울의 선교활동과 그의 선교 활동에 생긴 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팀으로 다녔다는 점과 방문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여 그곳의 상황을 확인하고 세운 교회에 믿음을 굳게 할 것을 당부했다는 점입니다. 1차 선교여행 시, 방문했던 더베와 루스드라에 들려 상황을 보고 믿음을 굳게 할 것을 부탁하고 다시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를 활발하게 이어 나아가려 하는 그 때에 바울의 여정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드로아에서 머물며 환상을 경험한 바울은 선교지의 방향을 유럽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아시아 지역을 넘어 유럽으로까지 복음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2차선교여행은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바나바와의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바울이 사도들과 교제하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1차 선교여행에 함께 동행하며 바울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습니다. 이러한 조력자인 바나바와의 갈등은 바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선교 동역자를 만나고, 그들이 방문한 교회가 굳건히 서가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늘어갔지만 기쁨과 함께 인간적인 고뇌, 고민도 함께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각종 요소들로 바울은 뚜렷한 선교의 방향성, 선교지를 정하기 어려운 지점에 서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오랜 시간을 신뢰하며 함께 의견을 나누던 사람과 갈등, 불화를 겪고,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정서적으로 온전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표를 내진 않지만 내적으로 많이 어렵고 힘들겠죠? 인간적인 이해로 바울 역시도 이러한 과정 중에 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런 바울에게 드로아에서 환상을 통해 그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환상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그들에게 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경험한 후, 즉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씁니다. 정확한 선교의 목적과 방향성이 세워진 것입니다. 지체할 이유도 없고 고민할 필요없이 마게도냐로 방향을 잡습니다.

  환상을 본 후 바울과 동역자들이 새롭게 도착한 곳은 빌립보입니다. 그 곳 강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시에서 그 만의 사업을 하고 있었고, 두아디라는 당시 염색업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자주색은 천연기법으로 쉽게 낼 수 있는 색이 아닙니다. 로마시대와 관련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주색 옷감을 주로 사용하는 계층이 왕, 고위관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주 옷감을 판매하는 루디아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바울과 동역자들의 후원자가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민과 방황의 시기를 벗어난 바울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선교의 기틀을 하나, 둘씩 준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 서 있습니다. 교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로 인해 주변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지켜온 룰과 방법만을 고수하는 답답하고 오래된 집단, 폐쇄적인 종교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상황을 거치면서 교회는 자신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남아버렸습니다. 이 낙인은 꽤 오랜 시간 우리들을 괴롭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교회와 개신교인들이 가치와 방향성을 잡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발 빠르게 대처하는 교회가 있는 반면, 예전의 모습을 답습하며 돌아가려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기 전,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던 시기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요?

  우리를 향한 차갑고 날 선 시선들을 생각해보면 아프지만, 그 속에는 우리를 향한 기대 역시 함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왜 개신교에 대한 실망과 신뢰도의 하락폭이 큰 것일까요. 사회가 비기독교인들이 믿는 사람들을 향해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했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에 실망감도 더 컸지 않을까요? 마치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믿는 사람들이잖아. 너희가 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있잖아.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버려 몸소 보여주었던 스스로 낮은 자가 되고 아프고 연약한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 우리가 걷고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책임감 있게 가꾸고 보존하는 삶, 정의, 생명,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달라고 요구합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느냐 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참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전해주신 삶을 우리의 가치, 원칙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의 모습이 변화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도 변할 것입니다.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나아길 길과 건강한 방향을 보여주십니다. 바울에게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주신 것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코로나19 상황을 잘 견뎌온 우리에게 더 발전하고 성숙한 길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시고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논밭을 뛰어다니며 보리밭 수확을 망친 아이도 이제 성인이 되어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애가 왜 저런담.”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에는 애정과 사랑이 있었음을 느끼고 기억합니다. 앞으로 이 땅을 살아갈 우리의 아이들이 기독교인으로 교회 다니는 아이로 사랑받고 다시 애정의 눈길을 받을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 노력해야하지 않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올바른 가치관과 성령의 이끄심을 믿으며 한걸음씩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