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전도사]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는 사람 – 2022년 5월 15일
사무엘하 1장 1-16절, 사도행전 16장 6-15절
[목적을 이루는 것]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때의 판단과 선택으로 그 계획을 이루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기도 합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심지어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버티지 못하는 자들은 때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목표를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고, 그 이외의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제대로 세운 것 같은데, 나의 목적이 더 중요하고, 더 의롭다고 생각해서 누군가의 삶을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19가 3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처음 발생 때보다 치명률도 낮아지고, 증상의 강도도 약해지고, 확진자의 발생이 줄고 있어서 밖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지만, 1차 대유행 때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감염자와 전파자에 대한 혐오 현상도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을 뒤집어 놨던 병이 있습니다. 바로 장티푸스입니다. 지금은 치료가 가능해서 치사율이 높지 않습니다만 당시 치사율은 20%에 달하는 아주 위험한 균이었습니다. 주로 균에 오염된 음식, 식수 등을 통해 감염됩니다. 메리 맬런이라는 홀로 미국으로 이민 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뉴욕에서 요리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무증상 보균자였고, 직업 특성상 물을 다루기 때문에 이 메리를 통해서 감염되는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증상 보균자라는 이유로 총 30년이라는 기간을 강제로 격리당한 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당시 언론은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로 옭아맸습니다. 그녀는 격리된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세균을 배양하는 임상실험에도 참여하면서 결국 그 격리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아주 위험한 병이었기에 당국의 결정이 합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제 입원으로 격리된 사람은 이 메리가 유일했습니다. 남자 보균자들, 귀부인 보균자들은 누구도 강제 격리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감호’의 처분에 그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울 때, 끊임없이 그 목적과 그 방법이 옳은지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목적, 잘못된 방법을 쉽게 허용하고 현실을 핑계 삼아 타협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자]
오늘 사무엘하 본문에 나온 이 ‘아말렉 청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윗에게 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청년은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쓴, 애도의 모습을 하고 다윗 앞에 엎드립니다. 이를 본 다윗은 이 청년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어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군인들이 달아나기도 하고,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전사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이 일의 진위를 알기 위해 이 청년에게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다그쳐 물어봅니다. 이 청년은 다윗에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전합니다.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 임금님이 창에 기대어 몸을 버티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적의 병거와 기병대가 그에게 바짝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울 임금님이 고개를 돌리다가 저를 발견하시고는 누구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아말렉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울 임금님이 저더러 괴로워서 견딜 수 없으니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사실 것 같지 않아서 저는 그에게 다가가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머리에 쓰고 계신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이 청년이 전한, 사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사무엘상 마지막장인 31장에 기록된 것과 조금 다릅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오지만, 사무엘하는 사울이 이 청년에게 부탁하여 그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요? 사울이 죽은 길보아산은 해발 489미터의 석회암 산으로 이 청년이 봤다는 병거와 기병은 접근하기가 힘든 지형입니다. 사무엘상은 이 청년의 보고와 달리 사울이 궁수들이 쏜 화살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합니다. 정황상 궁수들이 사울을 추격했다는 사무엘상의 기록이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사울이 큰 부상을 입어 적군에게 욕보일 것이 두려워 자기의 무기 담당 병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무엘상의 기록이 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말렉 청년은 전쟁터에서 우연히 죽은 사울을 보았고, 왕을 상징하는 왕관과 팔찌를 취했을 것입니다. 이 때, 이 청년은 이것을 다윗에게 가져다주면 자신이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은 왜 사울의 물건을 보고 자신에게 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까요? 다윗은 질투에 눈 먼 사울이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려들자 그를 피해 도망 다녔습니다. 쫓기며 망명 생활을 했던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은 좋은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청년은 사울의 죽음을 알리고 왕의 증표를 다윗에게 주면 내가 다윗에게 유리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 자신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왕의 증표를 자신이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데 걸림돌이 제거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 옷을 찢으며 목 놓아 울고 단식하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다윗은 한때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삼상 24:5-8; 26:8-11). 특히 다윗은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아주 절친한 사이었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할 때, 그는 다윗을 도와줬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사울과의 갈등관계를 떠나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던 자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위해줬던 요나단에게 깊고 진정성 있는 애도를 표한 것입니다.
[왕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은 다윗]
이처럼 다윗의 반응은 아말렉 청년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 청년은 왕의 증표를 가져온 대가로 보상을 바랐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살해했다는 죄였고,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말렉 청년은 사울의 죽음을 본 순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으로 상황을 꾸며내 다윗에게 갔습니다. ‘제가 당신을 계속 죽이려고 위협하는 저 사울을 죽이고, 그 증표로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이로운 일을 행했으니 저에게 큰 상을 내려주십시오.’ 이런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간과 했던 것은 다윗은 당장 눈 앞의 이익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는 것이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이롭고,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는 이전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의 앞길을 묻고 나가는 자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신실한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실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하여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었기에 당장의 눈 앞의 유혹을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곧은 사람이었기에 무엇이 올바른지 분별할 줄 알았고, 아말렉 사람의 그 음흉한 속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다 보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쫓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아말렉 사람처럼 거짓으로 꾸며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 불의한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바르더라도 우리의 계획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부분은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 어디로 갈지 미리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 갔고 거기서 디모데를 만나 그에게 할례를 준 뒤 그와 함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규정들을 알려주었고, 교회들은 그 믿음이 굳건해지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6:1-5).
그런데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들은 로마의 한 행정구역 중 하나인 아시아 주에서 선교하는 것에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무시아 근처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 폼페이우스가 로마 자치령으로 창건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방해를 받고 그들이 가려고 한 곳으로 선교를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획을 바꾸어 드로아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기를 이곳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 환상은 그들의 선교가 바울이 세웠던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합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끄신다고 생각하였고, 그 길을 따라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은 유럽 지역의 복음화의 시작이 됩니다.
이번 선교 여행은 조금 특별합니다. 성령이 바울 일행의 선교활동을 직접적으로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성령과 예수의 영은 바울이 계획한 온갖 방향을 차단하고 유럽으로 가는 길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비록 계획한 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왔지만 바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항상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성공의 경험도 있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실패의 경험도 함께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에 완전한 실패는 없습니다. 계획은 우리가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그가 뜻하신 대로 이끌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네압볼리로 가고,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이 도시는 마게도냐 지방의 으뜸가는 도시이며, 로마의 식민지인 곳입니다. 거기에서 머물다가 안식일에 유대 사람들이 모여있을 법한 기도처를 찾아갑니다. 그곳에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유대인 여인들도 있고, 유대교에 호의를 보이는 이방인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자고,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됩니다. 루디아는 바울과 그 일행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끈질기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그 집에 머뭅니다. 바울은 새로운 곳의 선교를 시작하면서 마땅한 숙식 장소도 없이 선교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인 루디아는 이들의 선교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계획했던 것은 이뤄지지 않고 실패하였지만,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그를 가게 하시고, 새롭게 시작되는 유럽 선교의 첫 걸음을 떼게 하십니다. 그 낯선 곳에서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도 빌립보 토착민이 아닌 두아디라의 여인,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하셨고, 그 집을 유럽 선교의 첫번째 거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이끄는 길에는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졌고,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과 여, 기존 신앙자와 신입자 사이의 각종 차별들이 극복됩니다. 성령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 길을 더 확장해 나갑니다. 처음 시작은 예루살렘, 유대인 공동체를 향한 복음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는 그것을 넘어 이방으로, 땅 끝으로 그 경계를 계속 허물며 확장해 나갑니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인 자들은 멈추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계속 경계를 허물고, 차별을 극복하는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 우리의 목적을 다시 성찰하기]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The Pew Research Center)’에서 작년 11월 한국을 포함한 경제적으로 좀 괜찮게 산다고 하는 17개국, 성인 1만 8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질문은 ‘무엇이 당신의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듭니까?’ 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 주나요? 이 질문의 답들 중 상위에 나온 것들은 가족, 직업, 물질적 행복, 친구, 건강입니다. 그 중 3개의 국가를 뺀 14개의 국가에서 1위로 ‘가족’을 삶의 의미로 뽑았습니다. 이 14개의 국가에 우리나라는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위로 무엇을 뽑았을까요? 바로 물질적 행복을 뽑았습니다. 이어서 건강, 가족, 지위, 사회 순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 물질적 행복이 안 나온 것은 아닙니다. 가족, 직업적 성취 다음으로 물질적 행복이 많이 나왔습니다. 눈여겨 봐야할 것은 이 설문조사는 복수선택이 가능했습니다. 가족, 직업, 물질적 행복, 공동체, 사회, 친구, 건강, 취미, 인간관계, 자유, 종교 등 여러 보기를 주고 ‘당신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복수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랑 일본은 하나만 뽑은 사람들이 각각 62%, 59%를 차지했습니다.
어느새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물질적 행복만으로 국한 되어버렸습니다. 물질적 행복만이 내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얼만큼 가져야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지 않나요? 그러면 우리에게 삶을 더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설문을 보면서 어린이, 청소년들이 ‘돈 많은 백수가 되고싶다.’는 말이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실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오늘 사무엘하에서 본 아말렉 사람처럼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여서 그것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거짓을 일삼는 사람이 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리며 살아갔기에 당장 눈앞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다윗처럼 살아갈 것인지. 목적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법으로 내 삶의 목표를 향해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방법이 정의로우려면 우리의 삶의 목적도 정의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잡는다면, 비록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바울처럼 내 계획처럼 안되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느리겠지만 그 멈춤 마저 성령이 이끌어가심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선한 뜻대로 이끌어가셨음을 고백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자]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갑시다. 나의 욕심, 나의 강함을 버리고, 주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낮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 길에 때론 실패하고, 좌절하고, 갈등을 겪고, 멈추어 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내 삶이 지금은 실패한 삶처럼 보일지라도, 남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우리는 느리지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성령님과 함께 참된 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정말 그 어떤 것보다 값지고, 우리가 전혀 예측 못하는 큰 행복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물질적 풍요만을 쫓는 이 세상에서 참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 주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나의 한계를 넘어 많은 이들을 품고 살아가는 자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닫혀 있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이 들어오게 하여 주십시오. 성령님, 우리를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