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 – 2021년 9월 26일
요엘서 2장 12-17절, 시편 78편 1-8절, 로마서 13장 8-14절
[조용기 목사의 죽음 앞에서]
어떤 사건을 놓고, 또는 인물을 두고 평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에도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한 인간의 삶 또한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도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장점이 곧 단점이기도 하고, 빛과 그림자처럼 분리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어떤 사건과 인물을 두고 포폄을 하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14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립자 조용기 목사가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기간 중에는 고인(故人)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기에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는 1958년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천막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서 1992년 70만 명의 교인을 넘어서고, 1993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기록된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담임하며 한국인 목사로서는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목회 스타일과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일천 석을 거두는 부농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의 국회의원 도전 실패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이어서 발발한 한국 전쟁 속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당시에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되었던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지만, 당시 병문안 온 누나의 친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교시절 학교에 상주하던 미군과 대화를 나누며 영어에 익숙해지고, 오순절 교단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의 설교를 통역하는 기회도 얻으며, 후에 루이스 리처드(Louis Richards) 선교사와 대화를 통하여 신학 공부를 결심하게 됩니다. 이 때 조용기 목사가 만난 그리스도교는 가난과 굶주림, 병에서 해방시켜 주는 종교였던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체험으로 인해 그의 목회 또한 방언 은사, 기적 체험, 신유 집회를 통한 치유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한국 전쟁 이후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던 한국 사람들에게 조용기 목사의 목회는 한줄기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00년의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모든 신흥 종교의 발달은 대부분 치유 사역과 연결됩니다. 조선의 멸망과 일본 제국의 통치,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상황은 백성들을 가난과 질병의 구렁텅이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용기 목사의 목회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1973년에는 여의도에 연건평 3,200평 규모의 예배당을 짓게 됩니다. 당시 교회의 이름은 순복음 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였는데, 1979년에 이미 교인이 10만이 넘었고, ‘5중 복음’과 ‘3박자 축복’이라는 메시지는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맞물리며,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이 임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였습니다.
80만에 가까운 교인을 가진 교회라는 이름과 엄청난 재정 규모를 기반으로 조용기 목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이끌었고,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목회자”로 인식되며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전쟁 이후 가난과 질병에서 허덕이던 이 땅의 민초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목회를 통해서 삶의 의지와 열정을 갖게 했다는 것과 전 세계를 향한 구제와 선교의 역량을 펼쳤다는 점에서 조용기 목사의 목회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점이 있습니다.
[교회성장주의의 폐해들]
그러나 조용기 목사의 교회 성장 목회와 설교의 신학적 메시지는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했던 나사렛 예수의 복음에서 이탈한 것이었고, 지금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비난 받고 조롱 받는 대부분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을 치유하는 신유 집회는 어느 순간 자본주의적 탐욕으로 변질되었고,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고,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신앙으로 왜곡되었으며,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는 목회가 아니라 교회성장만이 성공한 목회처럼 여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에는 교인의 신앙 성숙과 무관하게, 하나님 나라 선교를 통해 세상에 봉사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교회를 성장시키기 못하는 목회자는 패배자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농후합니다.
한 때 휴거를 주장하기도 했고, 기독교 역사와 전통적인 신학과는 상관없는 성령의 증거나 과도한 방언 강조, 무분별한 성찬 예식, 부활 처녀 소동, 치병 안수에 대한 금품수수와 극단적 신비주의 및 삼박자 구원과 같은 저급한 종교적 혼합주의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정치에도 기웃거리며, 독재정권을 옹호하는가 하면,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등과 함께 우파 성향의 기독교 정당 결성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끝내는 돈의 유혹에 넘어가서 교회의 재정 중 131억원 배임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고, 순복음 재단의 가족 경영 문제와 천문학적 숫자의 은퇴 자금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목회가 개인과 가족의 사업이 된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아니라 개교회를 통해 하나의 왕국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비그리스도인이 한국 개신교의 현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는 한국 개신교를 사회악이라고 칭하면서 한국 개신교는 지금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남들을 혐오하는 종교이고, 자신들만 배부르고자 하는 탐욕의 종교이며, 반지성적으로 맹목적 신앙을 강요하는 무지의 종교라고 서슴지 않고 비판을 했습니다. 한국 개신교인들 전부가 탐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며 무지하고 무례한 것은 아니지만,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춰진 한국 개신교의 이미지가 어떠한 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고, 인권을 보장하며, 평화적인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녀평등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수많은 진보적인 교회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지금도 그런 교회들과 교인들이 많지만, 지금 한국 개신교 이미지는 이러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하나의 모델로 삼아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보다는 교회의 안정적인 존속과 성장 및 번영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대형교회를 꿈꾸는 목회자들은 조용기 목사의 치유 사역을 기대하며 예수의 복음을 심리학과 상담학으로 버무리고,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교인들의 윤리적 측면과 교회의 사회적 책무는 쉽게 저버립니다. 무분별하게 세상의 경영원리를 도입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불필요한 계급과 권위구조를 만듭니다. 담임목회자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면서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기업을 닮아 정치권력에까지 기웃거리는 세속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개교회성장주의만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모든 목회사역이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위선적이 됩니다. 그래서 갈수록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순간 이런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이런 목회에 동의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세상의 경영 기법을 믿고, 권력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 본문에서 예언자 요엘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 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말은 겉으로만 하는 척 하지 말고 생각과 감정의 모든 근원부터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철저하게 찾아보고 잘못한 지점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생명과 복을 주시기도 하지만, 죽음과 화를 일으키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개신교인들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복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찾았고, 심지어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이웃과 자연의 생명은 우습게 여기는 일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벌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 한다고 했고, 올바르게 지적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몰아냈던 것이 바로 지금의 타락한 개신교를 만들었고, 지금 추한 개신교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 기웃거렸기 때문에,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은 세상에 끌려 다니면서 세상으로부터도 비난과 조롱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이 한국 개신교에게 쏟아 붇는 비판의 언어들을 들으면서 제 속이 많이 아프고 상했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그리스도교가 깊이 병든 것 또한 사실이기에 이것을 치유해야 할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의 비판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무지한 세상은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듯이, 오늘날 세상도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고난을 당하고 함께 싸잡아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우리가 함께 채울 때, 한국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빛으로 다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의 태도와 삶의 자세]
세상이 혼란하고, 교회가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우리는 남겨진 칠천명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시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할 방주를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가 노래한 것처럼, 반역하며 고집만 부리는 세대, 마음이 견고하지 못한 세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의 교훈을 들으며,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8월 29일 일산은혜교회(이광하 목사)는 임시 공동의회를 열고 519명이 참여해서 찬성 453명, 반대 66명으로 자신들이 속한 예장 합신 교단을 탈퇴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예장 합신 교단은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고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는 교단인데, 은혜교회의 협동목사로 있는 김근주 교수의 신학적 성향을 문제 삼고, 한선영 목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회가 두 목사를 사임시키도록 교회에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많은 보수 교단은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일들을 많이 했는데, 이번 일산은혜교회는 그런 교단에 맞서 교인들이 교단 탈퇴를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지난 역사 속에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한편으로 많은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키려 했고, 인종차별도 서슴지 않았고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과 문화적 시대적 한계를 구별하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새 술에 맞는 새 부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스러운 행적과 능력과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미래의 세대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늘 바울 사도께서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네 인생을 사랑에 빚진 자의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고, 이웃의 사랑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빚은 갚아야 속이 편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빚을 갚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임과 동시에 또 다시 빚지게 하는 이중적 행위인데, 이로써 우리는 계속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가 됩니다.
한편 바울 사도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모든 율법이 들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거꾸로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사랑의 진실성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 없이 사랑을 말하면 값싼 은혜로 떨어진다고 일찍이 본 회퍼 목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율법의 준수는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위선적 행동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없는데, 억지로 하는 것은 지속성과 진실성을 담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진실 되려면 반드시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남에 대한 사랑, 둘 다가 확보되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면서 남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를 갖기 어렵습니다. 한편 나와 다른, 달라서 때로 낯설고 어색한, 심지어 꺼려지는 이에게까지 사랑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제일 기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무조건성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사랑도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아닙니다. 조건을 바라고, 받았기 때문에 주고, 주었기 때문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그 자체의 속성, 자기를 비워 남을 채우려고 하는 그 속성이 작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핵심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신 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여서 늘 예수님과 같은 사랑, 바울 사도가 깨달은 사랑을 하지는 못합니다. 주었는데 받지 못하면 서운한 것이 우리입니다. 사랑할 건덕지가 없는데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의 이런 유한성과 부족함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평가해 보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하기는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보면 별로 기대할 바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하시도록 나를 계속해서 비워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갑을 열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자리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그렇게 비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구원의 시간이 다가왔고, 낮이 가까이 왔기에 오히려 밤이 깊은 때이다.” 그렇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빛난다.”(夜深星逾煇)는 말이 있듯이,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어둠이 깊어도 곧 다가올 빛을 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듯이, 깊은 어둠은 현실에 대한 깊은 자각을 동반하고, 그 자각 속에서만 삶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달려 있습니다. 진짜 구원을 맛보기 위해 그동안 잘못 붙잡고 있었던 거짓 신앙은 내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빨리 우리 또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면서 전쟁과 군사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극우 정치의 언어에 오염되고, 탐욕과 권력의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에 심취한 시간들이 쌓였기에 그만큼 빛을 내는 일은 갑옷을 입어야 할 만큼 절실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교 윤리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둠은 계속 될 것입니다.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비우지 못한다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새벽은 가깝기 마련이지만, 밤이 깊었다고 잠만 자고 있다면 새벽은 원수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를 찬양하고 그분을 신처럼 받드시는 분들도 진지하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신 그 험난한 길들을 떠올리고,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사랑하셨던 그 분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 보금자리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빌딩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무슨 사회적 권력을 누리며, 세상의 명예를 얻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대의 어리석음과 불명예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심히 꺼리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한 희망을 두신 예수님은 그런 모든 외적 환경 속에서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들풀 하나에 담겨 있는 깊은 아름다움, 하늘을 나는 새가 누리는 참된 자유를 온전히 누리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시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 한다는 그 사실에 희망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만 온다면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딴 길로 가고, 세상에 물들고, 헛된 것에 집착한다 해도,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의 사랑이 좀 더 진실하고 철저하게 하여 주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게 하여 주소서. 신앙이 나의 신념으로 굳어지면서 보편적 하나님의 사랑을 가두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특별히 한국 개신교를 긍휼이 여겨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안일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우리를 깨워 주소서. 언제나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어둠이 깊다 하여 잠들지 않게 하시고, 새벽이 밝아 태양이 떠오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가장 먼저 밝은 빛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려는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늘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빛과 사랑으로 전진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