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아들을 통하여 – 2020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사야서 52장 7-10절, 시편 21편 5-7절, 히브리서 1장 1-4절
[예수님 생일 축하]
홍수희 시인의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바로 오늘 태어난/ 사랑스런 이여!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에도/ 당신은 오직 한 사람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봐요
꽃들도 저마다 하나이듯이/ 한낮의 태양도 하나이듯이/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이란 걸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적인가요/ 당신은 축복 받아/ 마땅한 사람!
온 세상을 당신께 드립니다/ 산과 바다 이 기쁨/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모두 생일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첫 발을 디딘 날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생일은 본인에게 참 뜻 깊은 날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아름답고 신비한 기적이며, 저와 여러분 각자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한 사람이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축복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일은 본인만 홀로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들이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친구들이 기억합니다. 아이들의 생일에는 부모님의 지갑이 열리고, 부모님의 생일에는 자녀들의 감사한 마음들이 가득합니다. 누군가 내 생일을 기억해 줄 때 참 행복하고 좋습니다. 또 누군가의 생일을 챙겨줄 때 우리 마음은 한없이 넓어집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는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이 찾아왔고,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작은 방 하나 얻을 길 없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동물들이 함께 울었을 그 날은 매우 소박하고 조촐했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생일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전 세계 21억의 그리스도인은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주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결정된 것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줄곧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해 왔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하게 한 것일까요?
[구원과 평화의 소식]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며 그분의 탄생을 기리게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 싸워 왔습니다. 홍수희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저마다 각기 다릅니다. 정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들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살다보니 때때로 갈등과 다툼이 생깁니다. 내 마음 속도 때때로 두 갈래 길이어서 이것을 해야 할지, 저것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더 심해집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서로 다른 욕구와 취향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잘 협의해서 해결하면 좋은데, 지난 역사 동안 인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힘 겨루기를 통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아 왔습니다. 강자는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했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언제나 약한 자이고 강한 자가 언제나 강한 자일 수 없기 때문에 약자가 강자가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보복이 일어났습니다. 약자는 한 대 맞았던 때의 억울함을 간직한 채 살다가 힘이 생기면 곧바로 상대를 때려눕히는 일들이 반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억울함을 분노로 표출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법, 오른뺨을 맞을 때 왼뺨을 돌려대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정의를 세워가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더 근원적으로 우리 안에는 약육강식의 짐승의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고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즉 모든 존재를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힘으로 강제하는 정의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는 정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께서는 왜 구유에 뉘어 강보에 쌓인 갓난 아기로 오시는 것일까요? 모든 힘을 제압하는 슈퍼맨이나 군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이 아니라,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아기로 오시는 것일까요? 참된 평화는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칼로 보습을 만들고, 창으로 쟁기를 만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인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갑옷을 두르고, 총과 칼을 준비하였습니다. 더 많은 무기를 가지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갓난 아기로 오십니다. 생글생글 웃는 아기 앞에서 우리 모두는 마음을 엽니다. 아기는 모든 존재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갓난 아기를 보며 분노를 품거나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기를 보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아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달래 주고, 기쁨을 주고, 위로를 합니다. 예수께서 군마를 타고 장군으로 오시지 않고 강보에 쌓여 누운 아기로 오시는 이유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날 하늘의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약점과 평범함을 자신의 속성으로 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하고 시시해 보일 수 있는 곳에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 왕이나 지도자, 개혁가가 되는 것, 당신이 사랑하시는 피조물보다 어떤 형태로든지 더 우월해지는 것을 항상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형제자매요, 친한 친구요 때때로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섬기는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항상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삶]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마음에 새기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삶 아니 흔들려도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삶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왕을 칭송하고 있는데, 왕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사랑에 잇닿아 있으므로 그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 이 노래는 왕에게 들려주는 노래이겠지만,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에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들을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언제나 흔들립니다. 외적 조건이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단단한 벽돌로 집을 짓는다 해도 땅 그 자체가 흔들릴 때면 속수무책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하는 존재들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에 또는 누군가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육신의 부모로 인해 태어났듯이, 우리는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고 동시에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늘 유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관계가 틀어지면 우리는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도 하고, 매우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일어서려면, 흔들리더라도 영원히 주저앉지 않으려면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주 먼 곳에 계셔서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우리들을 찾아 와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 안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그리고 성탄절 예배에 함께 하고 계신 전국의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실하고 진정한 나 자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을 찾으십시오. 진정한 자기를 찾을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였던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온전히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들 안에, 저와 여러분 안에 이미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평생에 걸쳐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도 알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다른 피조물과도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진짜 내 안에 숨어 계십니다. 진짜 나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우리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해서 결국 아들을 통해서 알려 주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광채이시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며 참된 자아를 찾은 내 자신이 능력 있는 말로 만물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비밀이요, 신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는 다르다고 많은 이들이 가르쳐 왔고, 특히 구약의 전통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교만한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때문에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면 사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진짜 모습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빈 자리 있습니다.]
성탄절이 종종 연극 무대에 올려지는 극이 있습니다. 제목은 “빈 방 있습니까?”입니다. 한국의 대본에는 주인공이 덕구라는 친구로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1966년 미국의 기독교잡지 가이드포스트(guideposts)에 디나 도나휴(Dina dodohue)가 쓴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wally)라는 9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녔는데, 그 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주인이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합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봅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습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섭니다. 바로 이때,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지켜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윌리는 아기 예수를 자기 안방에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실 안방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방에 예수님이 온전히 모셔진 사실을 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창조주께서 깃든 것을 깨달았다면 온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보존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모신 그 마음의 자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불러 오는 빈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노래 한 곡을 들려 드리는 것으로 오늘 제 설교는 마치겠습니다. 새민족 교회의 담임목사이시고 인디밴드 가수로도 활약하시는 황푸하 목사님의 노래 “빈 자리 있습니다.”를 들려 드립니다.
빈 자리 있습니다.
주님 오세요
빈자리 있습니다.
쓰러진 사람의 손잡아 줄 수 있는
당신의 구원을 모두에게 말하고 펼치는
빈자리 있습니다.
여러분 오세요
빈자리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의 편 되어서 싸워줄
주님의 구원을 살아가는 용기가 넘치는
빈자리 있습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세요. 우리들 마음에 오세요. 여기 빈 자리 있습니다. 쓰러진 사람의 손 잡아 줄 수 있고, 주님의 구원을 모두에게 말하고 펼치는 빈 자리를 마련합니다. 주님 오세요. 여기 생명사랑의 빈 자리가 있습니다. 힘 없는 사람의 편 되어서 싸워주고, 주님의 구원을 살아가며 이루는 그래서 또한 용기가 넘치는 빈자리 있습니다. 주님! 거룩한 주님, 우리를 마음으로 오세요!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온 세상을 위하여 언제나 빈 자리 하나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 오신 이 거룩한 날에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