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 1:1-2)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첫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명시적인 성경구절은 천주교가 제2의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마카베오서 하편에 등장합니다. 일곱 형제의 순교하는 장면을 지켜 보아야했던 어머니가 마지막 아들에게까지 당당하게 박해자들에게 맞서라면서 남긴 말 하나가 이러합니다. “얘야, 내 부탁을 들어 다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 난 것도 마찬가지다.”(7장 28절)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이든 만드실 수 있다는 창조신앙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굳게 지키는 뿌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적 생명현상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조가 시작되던 첫 시간, 무질서와 깊은 혼돈이 가득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시의 깊은 바다, 성경 전체에서 흑암의 세력으로 가득한, 그래서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며, 온갖 공포와 불안의 배경이 되는 그 물 위에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상처와 고된 노동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던 혼란의 트라우마의 흔적을 간직한 것이라면 어두운 사탄이 준동하는 것을 밟고 서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는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 모든 불안을 잠재우시고, 폭력의 공포를 멈추시고 깜깜한 세상을 밝히시는 분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는 표현은 신명기 32장 11-12절에서 비유하는 바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자기 새끼들을 보살피며 그 주위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과 겹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창주, <창세기마루>, 36-38)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어둠의 세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품으시면서 다시 그것을 밝게 만들고 계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방식은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가슴으로 품어서 선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불의와 싸우면서 불의를 닮아가지 않게 하소서. 품어서 새 것을 창조하는 당신의 지혜로운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게 하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